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신령한 편지와 같다.
즉 사람 마음 심비(心碑)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권면과 안부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고 편지의 글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건 비기독교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장로, 권사, 목사, 유명한 부흥사, 설교자, 신학자라도 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세상과 교계에서의 지명도와 대외적인 입지가 출중하고 또는 화려한 건물예배당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편지를 받는 자가 그리스도 안으로 진리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들어가 있느냐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수신자가 아니어서 이런 수신자는 편지의 모든 개념과 의미를 스스로 왜곡하고 상상한다. 보낸 발신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혼자 신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세상적 재미와 낙, 자랑 등으로 자기조차도 모르게 은밀하고 교묘히 경(經)의 글을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각도로 재각색해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적 본성상 거짓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성도’라 했을 때 여기서 ‘신실함’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뜻한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 때문에 당한 고난과 죽음이 ‘의’요, ‘자랑’이요,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굳게 믿는, 세상이 도저히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생각하기도 싫은 참된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자 고유의 어리석음이다. 곧 본성적 사고에 있어서의 자기부인과 세상에 대한 부정이다.
주의 복음의 말씀은 부모와 주위의 친척, 지인들이 모두 반대하는 남녀간의 사랑의 편지와 같아서 그 당사자들만 느끼고 알고 경험한 진실과 순수의 밀어(蜜語-密語)이다.
이런 면에서 물리적이고 생산적이며 외부적인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알아먹는 부흥과 발전만 거듭해 온 오늘의 대한민국 기독교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거나 정도의 차이일 뿐 대개의 주의 종들과 교인들이 편지 분량에 있어서 많거나 또는 적게, 하나님의 서신을 공문서 위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있어 외식(外飾)을 잘하는 종교인들(율법주의-은사신비주의-기복주의 신자들)은 교회에 넘쳐나나 진정 ‘신실한 성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편지의 발신자(하나님)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한다.
본인들은 정작 전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고 강력히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신실’하지 않고 ‘거짓’된 것이다.
무너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금의 상황과 징조를 보고 깨달음이 없는 신자는 자신이 거짓편에 서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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