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줄의 진리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아모스서 7장7-9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아모스가 “다림줄을 보나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서 계신 광경이 나옵니다.
어제 우리는 우리교회 모 남자집사님의 어머님께서 앞으로 거처하실 새 집 공사에 관한 심방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서 설교시에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안되고 튼튼해야 되며 완벽해야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사에는 기초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들 공부에 있어서도 기초가 중요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배우는데 산수기초가 잘 형성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장차 계속적으로 실력이 붙지 않습니다. 기본이 확립되어야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슬러서 난이도가 높은 고도의 수학도 풀 수가 있는 겁니다. 기초라고 해서 무시하고, 우습게 보고, 등한시하면 안됩니다. 바둑에 있어서도 기초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한 유명한 모 대학교수는 자기는 바둑책을 볼 때 기초 부분이 완전히 마스터가 안되면 다음 급수 단계의 책으로 넘어가질 않는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건축에 있어서는 다림줄이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림줄이 뭐냐면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수평을 맞춰서 담이 곧게 쌓아지느냐? 안 쌓아지느냐? 를 분별하는 잣대와 척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정확한 눈대중이 있어도 담 벽돌이 잘못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담과 집이 결국엔 무너지고 말아 버립니다. 신앙생활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신앙 인격에 관한 영적인 건축을 하는 겁니다. 하나의 집을 세우고 빌딩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교회를 출입하고 직분을 가지고 오랜 신앙의 연륜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주의 은혜와 생명의 터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전적인 구원과 은혜의 선물을 받아본 경험 없이 그냥 자기가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만들어 낸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앙의 영역을 가지고 그 터 위에 영적인 집을 세워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분명히 중요한 것은 구원을 확보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확보 받는다는 것은 주가 주 되심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나는 주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관계가 확실히 성립되는 구원의 터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주님만을 믿고 신뢰하는 차원의 자기 믿음의 집을 건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만의 고유한 신앙의 틀과 골격과 내용의 완성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건축에서는 다림줄이 중요한데 이 다림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도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과 척도가 없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림줄은 히브리어로 ‘아나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가 없는 교회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신앙의 골격을 유지하려고 하고 그릇된 형태로 영적인 건물을 지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무렇게나 신앙을 건축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의 다림줄을 가지고 신앙의 집을 잘 짓고 바르게 건축을 해 나가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지니고 또 성령의 조명 하에서 말씀이 밝히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비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조명의 빛을 받아야 어두운 영안이 활짝 열려서 내가 기뻐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 개인이 원하는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내 것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 십자가의 도가 없으면 항상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옳은 것, 자기 주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옳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 편에서 잘했다 생각을 하고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건축물을 멋있게 쌓아올렸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닌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온갖 율법적 행위를 하고 또 민족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준수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백성이 부패하고 심히 타락했기 때문에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시와 환상으로 하나님이 다림줄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을 계시 하시면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 뿐 아니라 우리가 여타의 다른 선지서들을 보거나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에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잘 한다고 스스로들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열심히 바치고 율법의 율례와 규례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기에 조금도 하나님 앞에 있어서 자신들에게는 하자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그런 유대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면에서는 바리새파 정통주의자들은 참 대단합니다. 미국의 뉴욕에는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근본주의 정통파들은 머리 이마의 미간이나 손에 율법의 규례와 양식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다닙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남다른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도태된 역사와 예수님이 초림 하셔서 유대 공동체를 향해 강한 심판의 공의의 말씀을 가했던 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암만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이라고 하는 규례를 지키고 손을 씻어 정결케 하고 온갖 종교적인 고행과 율법의 세칙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늘 이들을 생명 없는 죽은 고목과 같은 중심이 빠져버린 종교 집단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도 한결 같이 얘기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외관상 율법을 잘 지켜도 항상 하나님께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디로 향하고 기울어지냐면 이방과 우상 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교인들도 얼마나 열성적으로 철야도 잘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잘 합니까? 또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와 충성을 잘 하고 세상에 나가 선교와 전도를 띠 띄고 잘 합니까? 하지만 이런 한국 교인들 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의 그 종교적 열심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종교상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시사 무엇을 말씀 하시냐면 “너희들이 아무리 집회로 모이고 성회로 모이고 안식일을 지키고 수천 수만의 양을 잡아다가 나한테 피의 제사를 드리고 기름진 것으로 바쳐도 나는 기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빌어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자기들 나름대로의 인간적 다림줄을 따라 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적 종교적 행위의 다림줄을 하나님의 다림줄로 크게 착각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진단해보면 교인들이 주를 사랑하는 정도가 남다르고 열성적으로 말씀을 강독하며 모여서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선교를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신앙 행위가 암만 옳고 정당하고 바르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의 잣대로 보면 작금의 한국 교회는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세상 등지고 천국만을 바라보고 십자가 지고 자기부인을 한다”고 하면서도 교회 신앙의 내용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실질적으로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 인간적 열심, 충성, 열의, 열정 이런 것만 있고 천국을 명분화 시켜 수단으로한 세속화를 목표로 하고 있지,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진리가 성령과 함께 수반되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고 은혜를 제대로 체험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순 종교적인 제도와 틀과 행정력과 조직, 메마르고 경직된 형식, 인간의 행위 등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체한다는걸 모르고 있습니다. 또 은사주의적 신비주의가 잘못된 성령운동의 형태로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삶의 행태, 그리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의 문제점은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선하게 보신다고 하는 이 절대적 진리의 척도인 다림줄이 없기 때문에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 대신 ‘인간의 의’와 복음원리에 반하는 ‘율법적 사고’, ‘육신의 생각’등이 옛 이스라엘과 오늘의 교회 안에 불행하게도 가득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진리와 성령이 충만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복이 아닌 인간의 복이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오늘날의 현대 교회에서도 대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니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신분은 구별된 자를 말합니다.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 앞에 외식적 경건의 힘을 기울이고 쏟아 놓아서 신자는 절대 구별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절대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그 주님의 정결한 피가 자신의 심령에 흐를 때만이 그 피의 효력으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오늘 이 시대에는 참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어느 시대건 과거 교회사에서는 참된 부흥의 때는 기초적인 교리가 항상 재발견 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권이 융성하고 강성했을 때의 기독교 부패와 타락의 시기들 안에서는 주의 교회의 기본적이고 근간이 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교리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묻혀 버립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 다림줄이 가리워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림줄이 인간의 다림줄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참 이상하고 아이러니한 일들이 교계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이사야서 34장 11절 말씀을 보면 다림줄과 정반대인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가 나옵니다. 이 ‘줄과 추’는 하나님의 진짜 다림줄과 비스무리한 것입니다. 인간의 옳은 것, 사람의 평가, 인간의 경험, 감정, 그리고 인간적 지식, 인간의 눈대중, 인간의 열심 이런 것들이 바로 다림줄을 대처하는 ‘공허의 추’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과 교회 역사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진리가 진리로서 대접을 못 받습니다. 오히려 비진리가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비진리가 대중들에게 대접 받고 인간의 육신적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하여 활개치고 왕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진짜 다림줄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사단이 죄악 세상에서만 역사 한다고만 보면 안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늘 깨달아야 되고 늘 초점이 가야 될 부분이 뭐냐면 사단 마귀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자신의 활동영역을 전개하고 확장하느냐 입니다. 그 사단의 근본적인 활동 계획과 목표는 무엇이냐면 다름 아닌 교회를 장악하는데 있습니다. 무수한 거짓 교회, 가짜 교회를 생산해 교권을 장악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단에게는 어떻게 보면 이미 자기 소관이므로 관심 밖입니다. 사단의 관심은 교회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차단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마귀는 언제나 교회를 향해 고도의 술책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을 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개념을 교묘하고 깜쪽 같이 바꿔 버립니다. 참 그럴 듯 하게 말입니다. 그 악마의 작품은 바로 짝퉁복음 입니다. 짝퉁은 진품과 얼마나 똑같습니까. 가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구매자들의 사행심을 조장하는 진품 브랜드 마크를 비슷하게 해 놓고 분별이 안되게끔 합니다. 오리지날에 최대한 맞게끔 그렇게 모조는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자신을 항상 교회에서 진리와 아주 똑같으며 사람들이 조금도 눈치챌 수 없는 비진리의 말씀을 타고 역사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겉모습이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해 보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세상욕심이 가득하고 자기 ‘의’에 빠진 신자들의 눈에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여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나타내 현현합니다. 그리고 대량의 거짓 삯군 목회자들을 앞세워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교회 안에서 바꿔 치기 하고 인간의 옳은 것, 인간의 선, 인간의 양심, 인간이 좋아하는 것들을 마치 하나님도 옳은 것, 선이라 여기시고 또 좋아하신다고 떠벌리고 선전 합니다. 이렇게 진리로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의 영혼 심령 안에서 복음 아닌 것을 은밀히 속삭이면서 교회를 장악하고 부패시켜 버립니다. 사단은 이런 유형의 신자들에게 이들의 소원대로 물질적인 축복도 꽉꽉 눌러주고 병든 육신을 치유해 주기도 하고 세상적인 일이 잘되게끔 만들어주면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세상영광에 대한 기대심리를 쉼 없고 중단 없이 가지도록 만족한 응답을 해줍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우리들도 다림줄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 우리들도 말씀을 따라간다. 복음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좋아하고 천국을 향해서 나간다” 등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소린지 사단의 소린지 이게 분간이 안 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가장 하나님의 소리처럼 얘기하는 겁니다. 악마는 나 사단이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분별이 되게끔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모습을 가장하고 말씀을 가지고 역사한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사람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육신적, 세상적, 정욕적인 것을 늘 하나님의 선같이 겉포장 하여 그 죄들을 감추고 이들 다수 군중과 육적신자들이 좋아하는 기호와 입맛에 맞는 것들을 부추기고 채워 줍니다.
그러면 이 다수의 군중들은 기뻐하고 이 육신적 신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 삶 속에서 결실을 보았다고 간증을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까지의 말씀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예수께서 말씀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성구에 해당되는 대상은 이단 사이비 종파들만 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국한되는 말씀으로만 보면 큰 오산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많은 수의 한국교회들 안에 이러한 영적 심각성과 폐해가 작용되고 있음을 이 성경 구절을 통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유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다림줄은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세와 교권의 힘, 건물예배당의 사이즈와 목사의 유명도, 숫자와 분량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세속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맞물린 현대 교회는 가치관에 있어서 세상의 기준을 끌어들여 성경을 재도식화하는 잘못된 신앙구조물들의 건축 양식을 등단시켜 하나님의 시각과 평가와 방법이 아닌 인간의 단순한 계산과 측량으로 비롯된 숫자와 양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표준으로 삼습니다. 곧 사람 머릿수만 많으면 그것이 법이고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시각과 평가를 다수의 군중의 인간적으로 규합된 힘을 가지고 교권을 형성해서 이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애들 유희 놀이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사단은 언제나 교회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의 시야를 육신의 감각에 맞는 것들로 가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만이 신자의 진실한 다림줄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데 이것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면 주님의 영광과 일하심과 공로는 가리워지고 인간의 종교적인 활동만 왕성하게 돼서 외식적인 신자들, 그들 자신들만의 업적과 공로만 표면화 되어 버립니다. 그런 현상의 제공자는 목회자들입니다. 신자들을 십자가의 복음과 내면적인 신앙의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고 신자들을 늘 닦달하는 것입니다. “다들 복 받으려면 가서 교인 될 만한 사람들을 잡아 채 와라. 우리 교회가 성공적인 부흥을 이루어야 하니까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교과서로 해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하자!” 여러분들의 형편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잘 바쳐야 되고, 교회 출석을 잘 해야 하고, 금식기도를 해야 하고, 철야기도를 해야 하고, 교회 성경 프로그램과 구역예배에도 잘 참석하고, 교회 나와서 설거지도 좀 잘 하고, 청소도 하고, 선교도 해야 하고, 등등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교회에 꽁꽁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소속신자들은 교회의 명령과 지시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따라야 할 신앙의 덕목과 자신들의 아름다운 충성과 봉사와 헌신으로 당연하게 받아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로 하나님의 합격점을 받는 것이 아니며 금식한다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행위적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냐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분이 메시야 이시요, 구원의 은혜를 전적으로 주신다는 사실과 이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진실로 이 진리에 대한 진위성을 확실하게 믿는 크리스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현교회의 교인들의 신앙 행위의 모습이 지극히 열심은 있으나 맹목적입니다. 또 자신들의 육신적 만족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사랑하여 이것을 부둥켜 잡기 위해 광신도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각종 부흥 집회와 수많은 교회 행사의 열성적인 참여 등 그 안에서 빚어지는 외식적 행태를 종교적 경건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할렐루야와 아멘을 연발해 대는 데에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행위의 ’의‘인 이 자신들의 종교적 열성과 업적으로 기복심리를 하나님에게 계속적으로 촉발 시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인들은 마치 무슨 뇌가 없고 생각 없는 종교 사이보그들 내지는 종교 생활만을 아주 잘 하는 종교기계들 같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욕심이 맞물린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인간적 종교적 율법적 선악과에서 맺어지는 행위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려버리고 있습니다. 이 신앙상의 절대적 차원의 죄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부터 조장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이 시대가 어둡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신자들이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이들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옳지 못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래서 무엇보다도 절실히 바른 교훈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은 전부 소유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유무형의 갖가지 소유를 위해서 인간 업적 중심입니다. 이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서 교회는 참으로 분주하게들 움직입니다. 목회자들은 교세와 재정확충이라는 명분 있는 소유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교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부분을 자기들의 비즈니스와 종교의 성을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명예와 부, 성공과 종교권력의 욕심구축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채 말입니다. 더불어 신자들은 목회자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의식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건설한 종교왕국에 기득권을 가진 대접받는 경건하고 훌륭한 종교인들이 되기를 꿈꾸고 동시에 목회자들의 요구와 명령을 들어주면서 이 자칭 하늘의 사도들로부터 그 댓가로 세상적 복과 영광을 거머쥐려 합니다. 즉 거룩함으로 포장한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웃지 못할 종교적 개그인데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만을 심도 깊게 외치지 않고 각종 종교적 이벤트를 열기에 바쁩니다. 그 전에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던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하루는 자신의 당회장실에서 저를 위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유학 당시에 본인께서 축적해놨던 미국 대형교회 목사들의 목회자료, 그들의 노하우, 프로그램 데이터를 저한테 나중에 아낌없이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저를 사랑해서 애착을 가지고 건낸 이야기 인줄은 알겠는데 실은 저는 하나도 필요 없는 것들이어서 그냥 감사하다고는 말씀드리고 내심 씁쓸히 웃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도 좋다하는 목회 프로그램을 많이 찾아 다니십니다. 그래야 본인이 유능한 목회자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목사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교회 프로그램이나 목회 경영술에 목숨을 겁니다. 제가 있었을 당시에는 이 교회가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을 도입 했었는데 목사님께서 대단히 이것을 애착을 가지고 신뢰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령 제자 훈련 하는 교회는 제자훈련이, 셀과 목장 운영하는 교회는 셀과 목장이, 칼빈 주의자들은 칼빈이 예수님보다 더 커서 예수님을 가려 버리는게 문제 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는 이런 프로그램들로는 신자가 바뀌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 교육을 시키는 쪽도 받는 쪽도 다 신자의 정체성이 바뀌어 제자화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수료 받은 사람들을 제가 봐서 잘 압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헤메고 있는 것은 교육 받기 전이나 교육 받은 이후나 마찬가지 더란 말입니다. 이런 유형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대형교회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에 정신적으로 지배받고 종속된 영적으로 식민지화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자기 주체적 의식과 신앙이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참 멋대가리 없는 사람들 입니다. 또 제자훈련의 메카에서 훈련받은 그 해당교회 소속신자들은 수천억원이나 되는 돈을 드려 어마어마한 초메머드급 건물예배당을 강남에 짓겠다고 벼르고 있다가 교계일부 인사들과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저지를 당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들은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의 마음을 품은 제자들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핑계는 교회예배당 기존공간이 비좁아서 어쩔수 없는 처방책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교인들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욕심 많고 자기 합리화에 강한지 전혀 성경을 통해 깨달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죄인인 인간이 욕망의 분출의 최종통로가 거대한 건물을 지상에 건축하여 세울려고 하는지 자신들 죄된 마음 근원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거 로마제국과 히틀러,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문선명이가 이들과 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초호화 건물을 지어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 하고 싶어 하는 인간심리가 이런 인간행위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교회건물도 예외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현란한 프로그램들과 보이는 건물예배당 건축을 교회 외적 부흥의 성공적 요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기독교 방향이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주거나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교육을 받아서 자기 자신감이 생기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자신이 부인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프로그램 수료하면 다 된 줄로 알고 외식적으로 일부러 겸손하든 그렇지 않고 교만하든 나름 설치는 종교교사들이 교회 안에 많아지는 것은 이게 웬일 입니까? 또 화려한 건물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신분의 상승이라도 된냥 쓸데없는 자기 권위를 갖습니다. 자신들이 이 잘 건축해서 차려놓은 예배당을 다니는 교회주인이라는 것으로 위안 삼는 자랑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더욱 더 박차를 가해 세계선교라는 당연한 명분을 갖고 꿈과 비전의 슬로건을 앞세워 세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종교적 야망을 품습니다.
일종의 세상에 대한 큰 자신감인 것입니다. 본인들은 정작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열심이라고 얘기들은 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고 화려하고 멋있는 선교와 전도가 아닌, 정작 신앙상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자신이 자신에게 향한 내면적 선교와 전도,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쪽으로의 열심은 배워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배워도 마음속에 담고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교회 나와서 그 조직적인 체계에서 노력을 하고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 되고 금식과 철야를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인식 하는 것으로만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기 때문에 그 신비적인 능력이 말씀과 성령을 타고 내 마음과 영혼을 변화 시키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종교적 열심으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추종자들을 때려 잡으러 돌아다녔을 겁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유대정통성을 가지고 종교적인 남다른 고행과 수행을 다한다 했었을 지라도 그들의 종교적 사상체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거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측면을 살펴야 됩니다. 복음의 다림줄인 십자가를 모르면 대개의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그렇습니다. 자신들 마음 깊숙한 곳에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감춰진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가지고 타락하고 부패한 세속적 교회에 나가 그 곳에서 육에 속한 변질된 설교 말씀을 듣고 공감하면서 확증과 확인을 하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생각하는 선과 내가 생각하는 진리는 이건데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 들어보니까, 맞아 저것이구나 그러면서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 인간의 ’의‘이며 인간의 ’기복심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체는 아예 없고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맡아 주시옵소서 하나 실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먹기 위해 자기가 하나님 대신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는 그 인간의 교묘한 경건과 신적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장악하고자 하는 종교성으로 단장된 철저한 세상정복심리 이것을 맛보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도 그러한 것들에 관해 분명하게 확인을 시켜주고 성도들은 그것들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성경본문을 달랑 하나 읽어 놓고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그 분의 존재되심이 드러나는 쪽의 설교가 아닌 전혀 성경 본문이 의도하지 않는 빗나간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상황에서 필요하고 평범한 교양과 소유 욕구를 채워주는 강론이 교회 강단설교의 주류가 되어 버립니다. 전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입맛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십자가 복음의 다림줄이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질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표적과 기적을 보고 많은 군중이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그 다수의 사람들이 거진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입각한 신앙은 항상 어떤 자리와 지점에서만 확인되고 증명 되어야 하냐면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입니다. 즉 감추어진 사람의 마음은 십자가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믿음 안에는 어떠한 인간적 계산과 얄팍한 상술이 깔려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회라는 것을 목회자가 자기 세를 불리고 확장해서 교계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이름 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죽고자 하는 마음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로만 신앙과 사역의 삶이 증명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외에 다른 것으로는 절대 증명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곧 진리로 인한 고난과 죽음 그 자체 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신자를 바라 보시는 평가는 오직 ’십자가의 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다림줄을 제껴 놓고 자꾸 하나님과 다른 상거래를 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부터의 보상과 기대심리로 교회에 헌금도 바치고 새벽예배도 참석하고 철야예배도 하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와 선교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종교행위 이전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삶 속에서 쪼다 되고 병신되고 바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나의 길은 찾는 이가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림줄이라고 하는 것은 비공개성과 은폐성이 있습니다. 아무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은폐되어 있는 비공개적인 다림줄을 보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께 속한 절대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이 각 신자와 교회 안에 살아 역사 되어져야 합니다. 계시록 3장 1절에 보니까 사데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이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입니다.
미국에는 윌로크릭처치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가 담임하는 교회입니다. 미국의 빌 하이벨스가 얼마나 유명합니까. 윌로크릭처취가 외관상 전세계에서 거의 최고로 세련된 교회요 멋진 교회 입니다. 온갖 프로그램이 다 있고 화려한 조직과 행정력, 넘쳐나는 잘 훈련된 인적 자원, 그런데 그 교회 목회자들이 모여서 자기네들 영적 상태에 관한 자체 분석을 하니까 ”아 이거 목회 잘못했다“는 분석이 나온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 목사님들도 얼마나 많은 수가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가서 이 빌하이벨스와 릭워렌 등의 목회 시스템을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교회 목회에다 적용들을 했습니까? 그래놓고 자화자찬들을 합니다. 부흥이 되고 성도들이 변화가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변화라는 것은 이런 다양한 목회 패러다임으로 그렇게 쉽사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말씀의 운석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을 산산이 조각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신자가 십자가 말씀으로 들어갈 때만이 깨닫게 되는 신앙상의 인식론적 신비의 사건입니다. 제자훈련 몇 년 코스 과정, 알파 코스 몇 주 과정, 그 수료장 받아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진정한 신비의 차원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늘 교회조직과 행정력, 형식적 종교행위 강화, 각종 프로그램 가동, 크고 웅장한 건물 예배당 꾸미기,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교회 내의 여러 가지 문화행사 적극 유치, 교회 깜짝 행사 이벤트 추진, 예배당 안의 분위기 좋은 카페 운영, 은사 중심적 기적적 열광주의의 병적인 집착, 철학과 사변신학에 의존하는 인본주의 상대주의의 잡다하고 더럽고 썩은 다림줄들인 예수 외 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포괄주의 등을 쫒아 가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 17절 말씀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는데 저는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의 현대 교회들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체적으로는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곤고한 겁니다. 가련한 겁니다. 가난한 겁니다. 눈 먼 겁니다. 벌거벗은 겁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이에 반해 어떠한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느냐? 계시록 2장 9절 말씀의 서머나 교회 같은 교회들 입니다. 환난과 궁핍이 있어도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주님이 칭찬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의 무리들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진리를 쫓고 따라가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잘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교회는 심한 왜곡을 조장 합니다.
오늘날 현 세대의 교회들은 철학자 니체가 그의 책 ’즐거운 학문’에서 규정한 것처럼 인간들의 잣대와 평가를 가지고 신을 도륙하고 도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이야기 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가 진리의 다림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진정한 소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을 아무리 잘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한 번 재시기 시작하면 일순간에 다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게 바로 과거에는 유럽 교회였습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 메마른 신학이 융성하고 죽은 종교적 형식과 역사와 전통, 조잡하고 잡스럽고 신비한 은사역사만이 있으면 뭐 합니까? 십자가가 증거되지 않으면 생명이 나올 구석이 없으므로 모든 것들은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을 따라가야 됩니다. 본질을 놓치는 형식을 본질 삼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또 본질로 둔갑된 형식이 내용을 채우는 근본수단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말씀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였습니다. 한 개인의 신앙도 한 교회의 운명도 오직 다림줄인 십자가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고난 배후에 있는 참된 천국의 영광, 이 길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바르고 곧은 신앙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을 잘 건축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여러 가지 잘난체 하는 것으로 주님을 필요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래 걸려도 또 돌아가는 것 같아도 또 더디고 늦는 것 같아도 참된 신앙의 건축을 진리의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잘 쌓아 나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눈에는 숫자와 분량과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인간들의 화려한 종교적 축제와 잔치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믿는 자의 심장폐부 중심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다림줄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허접한 인간들의 평가, 인간들의 인정, 인간들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평가와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의 상술적인 생각과 교묘하고 간사한 영적인 장삿속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터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가 죽어서 주 앞에 드려지는 보배로운 산 제물로서만 하나님 앞에 바쳐지게 하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저희를 통해 참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이 세상에 나타나 싹트고 줄기가 자라나 열매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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