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줄의 진리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아모스서 7장7-9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아모스가 “다림줄을 보나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서 계신 광경이 나옵니다.

어제 우리는 우리교회 모 남자집사님의 어머님께서 앞으로 거처하실 새 집 공사에 관한 심방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에서 설교시에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안되고 튼튼해야 되며 완벽해야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사에는 기초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들 공부에 있어서도 기초가 중요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배우는데 산수기초가 잘 형성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장차 계속적으로 실력이 붙지 않습니다. 기본이 확립되어야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슬러서 난이도가 높은 고도의 수학도 풀 수가 있는 겁니다. 기초라고 해서 무시하고, 우습게 보고, 등한시하면 안됩니다. 바둑에 있어서도 기초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한 유명한 모 대학교수는 자기는 바둑책을 볼 때 기초 부분이 완전히 마스터가 안되면 다음 급수 단계의 책으로 넘어가질 않는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건축에 있어서는 다림줄이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림줄이 뭐냐면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수평을 맞춰서 담이 곧게 쌓아지느냐? 안 쌓아지느냐? 를 분별하는 잣대와 척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정확한 눈대중이 있어도 담 벽돌이 잘못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담과 집이 결국엔 무너지고 말아 버립니다. 신앙생활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신앙 인격에 관한 영적인 건축을 하는 겁니다. 하나의 집을 세우고 빌딩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교회를 출입하고 직분을 가지고 오랜 신앙의 연륜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주의 은혜와 생명의 터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전적인 구원과 은혜의 선물을 받아본 경험 없이 그냥 자기가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만들어 낸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앙의 영역을 가지고 그 터 위에 영적인 집을 세워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분명히 중요한 것은 구원을 확보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확보 받는다는 것은 주가 주 되심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나는 주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관계가 확실히 성립되는 구원의 터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주님만을 믿고 신뢰하는 차원의 자기 믿음의 집을 건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만의 고유한 신앙의 틀과 골격과 내용의 완성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건축에서는 다림줄이 중요한데 이 다림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도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과 척도가 없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림줄은 히브리어로 ‘아나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가 없는 교회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신앙의 골격을 유지하려고 하고 그릇된 형태로 영적인 건물을 지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무렇게나 신앙을 건축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의 다림줄을 가지고 신앙의 집을 잘 짓고 바르게 건축을 해 나가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지니고 또 성령의 조명 하에서 말씀이 밝히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비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조명의 빛을 받아야 어두운 영안이 활짝 열려서 내가 기뻐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 개인이 원하는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내 것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 십자가의 도가 없으면 항상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옳은 것, 자기 주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옳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 편에서 잘했다 생각을 하고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건축물을 멋있게 쌓아올렸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닌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온갖 율법적 행위를 하고 또 민족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잘 준수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백성이 부패하고 심히 타락했기 때문에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시와 환상으로 하나님이 다림줄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을 계시 하시면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 뿐 아니라 우리가 여타의 다른 선지서들을 보거나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에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잘 한다고 스스로들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열심히 바치고 율법의 율례와 규례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기에 조금도 하나님 앞에 있어서 자신들에게는 하자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그런 유대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면에서는 바리새파 정통주의자들은 참 대단합니다. 미국의 뉴욕에는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근본주의 정통파들은 머리 이마의 미간이나 손에 율법의 규례와 양식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다닙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남다른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도태된 역사와 예수님이 초림 하셔서 유대 공동체를 향해 강한 심판의 공의의 말씀을 가했던 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암만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이라고 하는 규례를 지키고 손을 씻어 정결케 하고 온갖 종교적인 고행과 율법의 세칙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늘 이들을 생명 없는 죽은 고목과 같은 중심이 빠져버린 종교 집단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도 한결 같이 얘기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외관상 율법을 잘 지켜도 항상 하나님께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디로 향하고 기울어지냐면 이방과 우상 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교인들도 얼마나 열성적으로 철야도 잘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잘 합니까? 또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와 충성을 잘 하고 세상에 나가 선교와 전도를 띠 띄고 잘 합니까? 하지만 이런 한국 교인들 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의 그 종교적 열심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종교상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시사 무엇을 말씀 하시냐면 “너희들이 아무리 집회로 모이고 성회로 모이고 안식일을 지키고 수천 수만의 양을 잡아다가 나한테 피의 제사를 드리고 기름진 것으로 바쳐도 나는 기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빌어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자기들 나름대로의 인간적 다림줄을 따라 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적 종교적 행위의 다림줄을 하나님의 다림줄로 크게 착각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진단해보면 교인들이 주를 사랑하는 정도가 남다르고 열성적으로 말씀을 강독하며 모여서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선교를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신앙 행위가 암만 옳고 정당하고 바르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의 잣대로 보면 작금의 한국 교회는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세상 등지고 천국만을 바라보고 십자가 지고 자기부인을 한다”고 하면서도 교회 신앙의 내용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실질적으로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 인간적 열심, 충성, 열의, 열정 이런 것만 있고 천국을 명분화 시켜 수단으로한 세속화를 목표로 하고 있지,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진리가 성령과 함께 수반되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고 은혜를 제대로 체험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순 종교적인 제도와 틀과 행정력과 조직, 메마르고 경직된 형식, 인간의 행위 등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체한다는걸 모르고 있습니다. 또 은사주의적 신비주의가 잘못된 성령운동의 형태로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삶의 행태, 그리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의 문제점은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선하게 보신다고 하는 이 절대적 진리의 척도인 다림줄이 없기 때문에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 대신 ‘인간의 의’와 복음원리에 반하는 ‘율법적 사고’, ‘육신의 생각’등이 옛 이스라엘과 오늘의 교회 안에 불행하게도 가득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진리와 성령이 충만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복이 아닌 인간의 복이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오늘날의 현대 교회에서도 대체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니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신분은 구별된 자를 말합니다.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 앞에 외식적 경건의 힘을 기울이고 쏟아 놓아서 신자는 절대 구별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절대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그 주님의 정결한 피가 자신의 심령에 흐를 때만이 그 피의 효력으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오늘 이 시대에는 참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어느 시대건 과거 교회사에서는 참된 부흥의 때는 기초적인 교리가 항상 재발견 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권이 융성하고 강성했을 때의 기독교 부패와 타락의 시기들 안에서는 주의 교회의 기본적이고 근간이 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교리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묻혀 버립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 다림줄이 가리워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림줄이 인간의 다림줄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참 이상하고 아이러니한 일들이 교계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이사야서 34장 11절 말씀을 보면 다림줄과 정반대인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가 나옵니다. 이 ‘줄과 추’는 하나님의 진짜 다림줄과 비스무리한 것입니다. 인간의 옳은 것, 사람의 평가, 인간의 경험, 감정, 그리고 인간적 지식, 인간의 눈대중, 인간의 열심 이런 것들이 바로 다림줄을 대처하는 ‘공허의 추’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과 교회 역사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진리가 진리로서 대접을 못 받습니다. 오히려 비진리가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비진리가 대중들에게 대접 받고 인간의 육신적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하여 활개치고 왕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진짜 다림줄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사단이 죄악 세상에서만 역사 한다고만 보면 안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늘 깨달아야 되고 늘 초점이 가야 될 부분이 뭐냐면 사단 마귀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자신의 활동영역을 전개하고 확장하느냐 입니다. 그 사단의 근본적인 활동 계획과 목표는 무엇이냐면 다름 아닌 교회를 장악하는데 있습니다. 무수한 거짓 교회, 가짜 교회를 생산해 교권을 장악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단에게는 어떻게 보면 이미 자기 소관이므로 관심 밖입니다. 사단의 관심은 교회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차단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마귀는 언제나 교회를 향해 고도의 술책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을 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개념을 교묘하고 깜쪽 같이 바꿔 버립니다. 참 그럴 듯 하게 말입니다. 그 악마의 작품은 바로 짝퉁복음 입니다. 짝퉁은 진품과 얼마나 똑같습니까. 가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구매자들의 사행심을 조장하는 진품 브랜드 마크를 비슷하게 해 놓고 분별이 안되게끔 합니다. 오리지날에 최대한 맞게끔 그렇게 모조는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자신을 항상 교회에서 진리와 아주 똑같으며 사람들이 조금도 눈치챌 수 없는 비진리의 말씀을 타고 역사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겉모습이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해 보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세상욕심이 가득하고 자기 ‘의’에 빠진 신자들의 눈에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여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나타내 현현합니다. 그리고 대량의 거짓 삯군 목회자들을 앞세워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교회 안에서 바꿔 치기 하고 인간의 옳은 것, 인간의 선, 인간의 양심, 인간이 좋아하는 것들을 마치 하나님도 옳은 것, 선이라 여기시고 또 좋아하신다고 떠벌리고 선전 합니다. 이렇게 진리로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의 영혼 심령 안에서 복음 아닌 것을 은밀히 속삭이면서 교회를 장악하고 부패시켜 버립니다. 사단은 이런 유형의 신자들에게 이들의 소원대로 물질적인 축복도 꽉꽉 눌러주고 병든 육신을 치유해 주기도 하고 세상적인 일이 잘되게끔 만들어주면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세상영광에 대한 기대심리를 쉼 없고 중단 없이 가지도록 만족한 응답을 해줍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우리들도 다림줄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 우리들도 말씀을 따라간다. 복음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좋아하고 천국을 향해서 나간다” 등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소린지 사단의 소린지 이게 분간이 안 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가장 하나님의 소리처럼 얘기하는 겁니다. 악마는 나 사단이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분별이 되게끔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모습을 가장하고 말씀을 가지고 역사한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사람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육신적, 세상적, 정욕적인 것을 늘 하나님의 선같이 겉포장 하여 그 죄들을 감추고 이들 다수 군중과 육적신자들이 좋아하는 기호와 입맛에 맞는 것들을 부추기고 채워 줍니다.

그러면 이 다수의 군중들은 기뻐하고 이 육신적 신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 삶 속에서 결실을 보았다고 간증을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까지의 말씀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예수께서 말씀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성구에 해당되는 대상은 이단 사이비 종파들만 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국한되는 말씀으로만 보면 큰 오산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많은 수의 한국교회들 안에 이러한 영적 심각성과 폐해가 작용되고 있음을 이 성경 구절을 통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유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다림줄은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세와 교권의 힘, 건물예배당의 사이즈와 목사의 유명도, 숫자와 분량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세속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와 맞물린 현대 교회는 가치관에 있어서 세상의 기준을 끌어들여 성경을 재도식화하는 잘못된 신앙구조물들의 건축 양식을 등단시켜 하나님의 시각과 평가와 방법이 아닌 인간의 단순한 계산과 측량으로 비롯된 숫자와 양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표준으로 삼습니다. 곧 사람 머릿수만 많으면 그것이 법이고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시각과 평가를 다수의 군중의 인간적으로 규합된 힘을 가지고 교권을 형성해서 이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애들 유희 놀이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사단은 언제나 교회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의 시야를 육신의 감각에 맞는 것들로 가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만이 신자의 진실한 다림줄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데 이것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면 주님의 영광과 일하심과 공로는 가리워지고 인간의 종교적인 활동만 왕성하게 돼서 외식적인 신자들, 그들 자신들만의 업적과 공로만 표면화 되어 버립니다. 그런 현상의 제공자는 목회자들입니다. 신자들을 십자가의 복음과 내면적인 신앙의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고 신자들을 늘 닦달하는 것입니다. “다들 복 받으려면 가서 교인 될 만한 사람들을 잡아 채 와라. 우리 교회가 성공적인 부흥을 이루어야 하니까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교과서로 해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하자!” 여러분들의 형편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잘 바쳐야 되고, 교회 출석을 잘 해야 하고, 금식기도를 해야 하고, 철야기도를 해야 하고, 교회 성경 프로그램과 구역예배에도 잘 참석하고, 교회 나와서 설거지도 좀 잘 하고, 청소도 하고, 선교도 해야 하고, 등등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교회에 꽁꽁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소속신자들은 교회의 명령과 지시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따라야 할 신앙의 덕목과 자신들의 아름다운 충성과 봉사와 헌신으로 당연하게 받아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로 하나님의 합격점을 받는 것이 아니며 금식한다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행위적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냐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분이 메시야 이시요, 구원의 은혜를 전적으로 주신다는 사실과 이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진실로 이 진리에 대한 진위성을 확실하게 믿는 크리스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현교회의 교인들의 신앙 행위의 모습이 지극히 열심은 있으나 맹목적입니다. 또 자신들의 육신적 만족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사랑하여 이것을 부둥켜 잡기 위해 광신도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각종 부흥 집회와 수많은 교회 행사의 열성적인 참여 등 그 안에서 빚어지는 외식적 행태를 종교적 경건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할렐루야와 아멘을 연발해 대는 데에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행위의 ’의‘인 이 자신들의 종교적 열성과 업적으로 기복심리를 하나님에게 계속적으로 촉발 시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인들은 마치 무슨 뇌가 없고 생각 없는 종교 사이보그들 내지는 종교 생활만을 아주 잘 하는 종교기계들 같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욕심이 맞물린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인간적 종교적 율법적 선악과에서 맺어지는 행위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려버리고 있습니다. 이 신앙상의 절대적 차원의 죄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부터 조장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이 시대가 어둡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신자들이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이들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옳지 못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래서 무엇보다도 절실히 바른 교훈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은 전부 소유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유무형의 갖가지 소유를 위해서 인간 업적 중심입니다. 이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서 교회는 참으로 분주하게들 움직입니다. 목회자들은 교세와 재정확충이라는 명분 있는 소유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교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부분을 자기들의 비즈니스와 종교의 성을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명예와 부, 성공과 종교권력의 욕심구축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채 말입니다. 더불어 신자들은 목회자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의식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건설한 종교왕국에 기득권을 가진 대접받는 경건하고 훌륭한 종교인들이 되기를 꿈꾸고 동시에 목회자들의 요구와 명령을 들어주면서 이 자칭 하늘의 사도들로부터 그 댓가로 세상적 복과 영광을 거머쥐려 합니다. 즉 거룩함으로 포장한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웃지 못할 종교적 개그인데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만을 심도 깊게 외치지 않고 각종 종교적 이벤트를 열기에 바쁩니다. 그 전에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던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하루는 자신의 당회장실에서 저를 위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유학 당시에 본인께서 축적해놨던 미국 대형교회 목사들의 목회자료, 그들의 노하우, 프로그램 데이터를 저한테 나중에 아낌없이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저를 사랑해서 애착을 가지고 건낸 이야기 인줄은 알겠는데 실은 저는 하나도 필요 없는 것들이어서 그냥 감사하다고는 말씀드리고 내심 씁쓸히 웃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도 좋다하는 목회 프로그램을 많이 찾아 다니십니다. 그래야 본인이 유능한 목회자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목사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교회 프로그램이나 목회 경영술에 목숨을 겁니다. 제가 있었을 당시에는 이 교회가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을 도입 했었는데 목사님께서 대단히 이것을 애착을 가지고 신뢰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령 제자 훈련 하는 교회는 제자훈련이, 셀과 목장 운영하는 교회는 셀과 목장이, 칼빈 주의자들은 칼빈이 예수님보다 더 커서 예수님을 가려 버리는게 문제 입니다. 

리고 제가 볼 때는 이런 프로그램들로는 신자가 바뀌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 교육을 시키는 쪽도 받는 쪽도 다 신자의 정체성이 바뀌어 제자화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수료 받은 사람들을 제가 봐서 잘 압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헤메고 있는 것은 교육 받기 전이나 교육 받은 이후나 마찬가지 더란 말입니다. 이런 유형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대형교회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에 정신적으로 지배받고 종속된 영적으로 식민지화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자기 주체적 의식과 신앙이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참 멋대가리 없는 사람들 입니다. 또 제자훈련의 메카에서 훈련받은 그 해당교회 소속신자들은 수천억원이나 되는 돈을 드려 어마어마한 초메머드급 건물예배당을 강남에 짓겠다고 벼르고 있다가 교계일부 인사들과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저지를 당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들은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예수의 마음을 품은 제자들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핑계는 교회예배당 기존공간이 비좁아서 어쩔수 없는 처방책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교인들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욕심 많고 자기 합리화에 강한지 전혀 성경을 통해 깨달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죄인인 인간이 욕망의 분출의 최종통로가 거대한 건물을 지상에 건축하여 세울려고 하는지 자신들 죄된 마음 근원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거 로마제국과 히틀러,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문선명이가 이들과 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초호화 건물을 지어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 하고 싶어 하는 인간심리가 이런 인간행위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교회건물도 예외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현란한 프로그램들과 보이는 건물예배당 건축을 교회 외적 부흥의 성공적 요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기독교 방향이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주거나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교육을 받아서 자기 자신감이 생기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자신이 부인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프로그램 수료하면 다 된 줄로 알고 외식적으로 일부러 겸손하든 그렇지 않고 교만하든 나름 설치는 종교교사들이 교회 안에 많아지는 것은 이게 웬일 입니까? 또 화려한 건물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신분의 상승이라도 된냥 쓸데없는 자기 권위를 갖습니다. 자신들이 이 잘 건축해서 차려놓은 예배당을 다니는 교회주인이라는 것으로 위안 삼는 자랑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더욱 더 박차를 가해 세계선교라는 당연한 명분을 갖고 꿈과 비전의 슬로건을 앞세워 세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종교적 야망을 품습니다.

일종의 세상에 대한 큰 자신감인 것입니다. 본인들은 정작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열심이라고 얘기들은 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고 화려하고 멋있는 선교와 전도가 아닌, 정작 신앙상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자신이 자신에게 향한 내면적 선교와 전도,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쪽으로의 열심은 배워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배워도 마음속에 담고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교회 나와서 그 조직적인 체계에서 노력을 하고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 되고 금식과 철야를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인식 하는 것으로만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기 때문에 그 신비적인 능력이 말씀과 성령을 타고 내 마음과 영혼을 변화 시키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종교적 열심으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추종자들을 때려 잡으러 돌아다녔을 겁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유대정통성을 가지고 종교적인 남다른 고행과 수행을 다한다 했었을 지라도 그들의 종교적 사상체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거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측면을 살펴야 됩니다. 복음의 다림줄인 십자가를 모르면 대개의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그렇습니다. 자신들 마음 깊숙한 곳에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감춰진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가지고 타락하고 부패한 세속적 교회에 나가 그 곳에서 육에 속한 변질된 설교 말씀을 듣고 공감하면서 확증과 확인을 하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생각하는 선과 내가 생각하는 진리는 이건데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 들어보니까, 맞아 저것이구나 그러면서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 인간의 ’의‘이며 인간의 ’기복심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체는 아예 없고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맡아 주시옵소서 하나 실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먹기 위해 자기가 하나님 대신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는 그 인간의 교묘한 경건과 신적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장악하고자 하는 종교성으로 단장된 철저한 세상정복심리 이것을 맛보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도 그러한 것들에 관해 분명하게 확인을 시켜주고 성도들은 그것들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성경본문을 달랑 하나 읽어 놓고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그 분의 존재되심이 드러나는 쪽의 설교가 아닌 전혀 성경 본문이 의도하지 않는 빗나간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상황에서 필요하고 평범한 교양과 소유 욕구를 채워주는 강론이 교회 강단설교의 주류가 되어 버립니다. 전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입맛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십자가 복음의 다림줄이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질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표적과 기적을 보고 많은 군중이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그 다수의 사람들이 거진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입각한 신앙은 항상 어떤 자리와 지점에서만 확인되고 증명 되어야 하냐면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입니다. 즉 감추어진 사람의 마음은 십자가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믿음 안에는 어떠한 인간적 계산과 얄팍한 상술이 깔려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회라는 것을 목회자가 자기 세를 불리고 확장해서 교계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이름 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죽고자 하는 마음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로만 신앙과 사역의 삶이 증명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외에 다른 것으로는 절대 증명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곧 진리로 인한 고난과 죽음 그 자체 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신자를 바라 보시는 평가는 오직 ’십자가의 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다림줄을 제껴 놓고 자꾸 하나님과 다른 상거래를 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부터의 보상과 기대심리로 교회에 헌금도 바치고 새벽예배도 참석하고 철야예배도 하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와 선교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종교행위 이전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삶 속에서 쪼다 되고 병신되고 바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나의 길은 찾는 이가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림줄이라고 하는 것은 비공개성과 은폐성이 있습니다. 아무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은폐되어 있는 비공개적인 다림줄을 보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께 속한 절대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이 각 신자와 교회 안에 살아 역사 되어져야 합니다. 계시록 3장 1절에 보니까 사데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이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입니다.

미국에는 윌로크릭처치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가 담임하는 교회입니다. 미국의 빌 하이벨스가 얼마나 유명합니까. 윌로크릭처취가 외관상 전세계에서 거의 최고로 세련된 교회요 멋진 교회 입니다. 온갖 프로그램이 다 있고 화려한 조직과 행정력, 넘쳐나는 잘 훈련된 인적 자원, 그런데 그 교회 목회자들이 모여서 자기네들 영적 상태에 관한 자체 분석을 하니까 ”아 이거 목회 잘못했다“는 분석이 나온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 목사님들도 얼마나 많은 수가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가서 이 빌하이벨스와 릭워렌 등의 목회 시스템을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교회 목회에다 적용들을 했습니까? 그래놓고 자화자찬들을 합니다. 부흥이 되고 성도들이 변화가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변화라는 것은 이런 다양한 목회 패러다임으로 그렇게 쉽사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말씀의 운석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을 산산이 조각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신자가 십자가 말씀으로 들어갈 때만이 깨닫게 되는 신앙상의 인식론적 신비의 사건입니다. 제자훈련 몇 년 코스 과정, 알파 코스 몇 주 과정, 그 수료장 받아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진정한 신비의 차원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늘 교회조직과 행정력, 형식적 종교행위 강화, 각종 프로그램 가동, 크고 웅장한 건물 예배당 꾸미기,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교회 내의 여러 가지 문화행사 적극 유치, 교회 깜짝 행사 이벤트 추진, 예배당 안의 분위기 좋은 카페 운영, 은사 중심적 기적적 열광주의의 병적인 집착, 철학과 사변신학에 의존하는 인본주의 상대주의의 잡다하고 더럽고 썩은 다림줄들인 예수 외 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포괄주의 등을 쫒아 가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 17절 말씀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는데 저는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의 현대 교회들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체적으로는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곤고한 겁니다. 가련한 겁니다. 가난한 겁니다. 눈 먼 겁니다. 벌거벗은 겁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이에 반해 어떠한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느냐? 계시록 2장 9절 말씀의 서머나 교회 같은 교회들 입니다. 환난과 궁핍이 있어도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주님이 칭찬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의 무리들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진리를 쫓고 따라가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잘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교회는 심한 왜곡을 조장 합니다.

오늘날 현 세대의 교회들은 철학자 니체가 그의 책 ’즐거운 학문’에서 규정한 것처럼 인간들의 잣대와 평가를 가지고 신을 도륙하고 도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이야기 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가 진리의 다림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진정한 소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을 아무리 잘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한 번 재시기 시작하면 일순간에 다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게 바로 과거에는 유럽 교회였습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 메마른 신학이 융성하고 죽은 종교적 형식과 역사와 전통, 조잡하고 잡스럽고 신비한 은사역사만이 있으면 뭐 합니까? 십자가가 증거되지 않으면 생명이 나올 구석이 없으므로 모든 것들은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을 따라가야 됩니다. 본질을 놓치는 형식을 본질 삼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또 본질로 둔갑된 형식이 내용을 채우는 근본수단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말씀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였습니다. 한 개인의 신앙도 한 교회의 운명도 오직 다림줄인 십자가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고난 배후에 있는 참된 천국의 영광, 이 길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바르고 곧은 신앙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을 잘 건축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여러 가지 잘난체 하는 것으로 주님을 필요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래 걸려도 또 돌아가는 것 같아도 또 더디고 늦는 것 같아도 참된 신앙의 건축을 진리의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잘 쌓아 나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눈에는 숫자와 분량과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인간들의 화려한 종교적 축제와 잔치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믿는 자의 심장폐부 중심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다림줄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허접한 인간들의 평가, 인간들의 인정, 인간들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평가와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의 상술적인 생각과 교묘하고 간사한 영적인 장삿속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터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가 죽어서 주 앞에 드려지는 보배로운 산 제물로서만 하나님 앞에 바쳐지게 하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저희를 통해 참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이 세상에 나타나 싹트고 줄기가 자라나 열매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죄인의 역심문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6장24-32절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는 바울의 고초가 나타나 있는 대목입니다. 

사도바울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 여러 학문에 출중했고 유대교의 연갑자들보다 율법에 정통했으며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에 관해서는 열심히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적 차원의 수준에서의 율법적인 의와 도만 깨달았을 뿐이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생명의 빛을 인식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구약의 율법의 신앙적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를 박해하는데 최선봉장에 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한 종교적 열혈남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가졌던 율법적 믿음의 시각이 그를 오히려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배척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봤을 때 우리는 복음의 신앙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종교적 의인까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중생의 체험과 새로운 영적 의식을 가지지 아니하면 모두가 헛수고 뿐인 신앙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생명의 빛을 받고 나서는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세상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수를 위하여 고자도 될 만하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스스로 진리를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자로 변화 되었습니다.

바울은 곧 그런 십자가의 척박한 진리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가장 영광된 길이라 하는 신앙의 자부심과 영적인 당당함을 가지고 그 당대의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고 세계전도에 앞장서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하여서 복음의 포문을 여는 와중에서 주님의 뜻에 의해 다른 전도 여행지로 가지 아니하고 로마의 가이사의 법정에 서기 위해 죽음도 겁내지 않고 환난을 자처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 26장 24절~32절까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할 때 회당에서 복음을 변증하는 방식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적대시하는 일부 다수의 유대인들과 영적인 투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또 유대를 식민 삼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힘을 빌려서 바울을 죽이고자 공모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졌던 바울을 향한 미움이 그전에는 바울이 똑같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가졌던 적대적 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역으로 바울이 유대인 자기 동족들에게 예수를 믿음으로 미움을 사서 고소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먼저 대제사장인 아나니아에게 끌려갑니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로마의 한 백부장에게 넘겨줍니다. 그 후 그 백부장은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바울을 넘겨 주고 천부장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벨릭스의 후임인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여 바울을 또한 넘겨받습니다. 이 때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가 그의 부인 버니게와 같이 신임총독 베스도를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갔다가 베스도로부터 바울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재판건에 관해 베스도로부터 들은 아그립바왕은 자신도 바울의 말을 들어 보겠노라고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아그립바가 재판정에서 바울을 접견하는 대목이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가 로마 제국의 법정에 세운 바울의 죄목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전염병 같은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전염병 같이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도 전염병은 무섭습니다. 지금 세계가 아무리 문명이 발전됐어도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바울의 죄목은 이 염병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한 단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프랑스어로는 ‘polysemie’ (폴리세미)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의성’ 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의 기호가 여러 의미의 내용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염병이라는 말 중에 히브리어로 ‘마베트’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중에 ‘죽음’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바울은 사망을 퍼뜨리는 독종인 겁니다. 사실 바울은 생명을 전하고 확산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복음의 사람인데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분된 모습이 세상에서 어떠한가 라는 것을 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세상과 비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인정받고 추앙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진리를 소유하고 천국백성이 됐다고 하는 최종적인 자기증명은 바울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이렇게 전염병 같은 자로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유대교에 몸담고 있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하고 흠모할 만한 대상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 그의 생애는 십자가의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소와 비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영적으로 조화로울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을 향해 역행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세상원리에 역기능적이고 모든 세상의 힘을 무력화 시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복음은 역설적인 천국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 바깥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야말로 전염병 같은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였던 것입니다.

어떤 한 국가를 놓고 볼 때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죄는 역모죄 입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국가전복을 위한 역모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 입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이 역모죄에 연루된 사람은 삼족이 멸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눈에 바울은 유대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배교자요 신성모독자로 비춰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 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실질적으로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아니라 진정한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자입니다. 그런 신령한 면에서 성전을 정화하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대는 바울의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찬연한 신앙세계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영적무지로 그들은 바울을 죄인 취급해서 로마제국의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유대가 구약적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자신도 이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박해했던 스데반 집사가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스데반 집사도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신종 전염병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가 순교 전에 유대인들을 향해 했던 변론도 과거의 구약적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구약의 전역사와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신앙적 사고를 지적 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전역사와 선지예언과 율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 메시야를 알리고 나타내기 위해서 섭리상 필요했던 것이라고 유대인들에게 얘기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유대교가 율법 율법, 전통 전통 하는데 이들이 그 구약의 율법과 전통의 의미를 바로 알고 세우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되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진실한 복음 안에서 자신은 참된 소망을 가졌기에 지금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복음선포자로서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는 유대인들로부터 넘겨받은 이 바울을 어떻게 봤겠습니까? 그냥 하나의 정신병자 정도로 취급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 전에 자기가 가진 학식이 많았기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바울의 고소 사건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단지 바울이 자기들의 종교를 침해하고 죽은 예수를 살아 있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고발 한 것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이들을 향해서 자신은 정신이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심문을 받아야 될 처지에 있는 바울이 “당신이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는 줄 아나이다.” 라고 하면서 그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 중 최고의 권력자인 아그립바에게 대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울은 생각과 의식이 유대와 이방과는 달랐습니다. 그 의식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의 법과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자기에게 밀고 들어오는 자들에게 하늘의 힘과 영광과 축복과 평화를 끼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지역을 관할하는 아그립바왕에게 “당신이 선지자의 말을 믿는 도다. 믿는 줄 안다”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오시리라 한 왕 예수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은 믿어야 된다고 하는 복음의 변증을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계속 고난을 자처했고 로마압송을 오히려 고대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아그립바는 바울이 만약 가이사에게 상소만 안했더라도 석방 될 수 있을 뻔 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신앙의 진정한 사명적 정체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의 성령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신과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만이 유일한 이 세상의 정확한 판단자, 생각과 영적 시각에 있어서 유일하게 모든 사람과 만물을 옳게 판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질서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 이 성경본문에 나오는 재판정은 유대와 이방의 집권자들이 바울을 죄인 취급해서 그 곳에 세운 것 같지만 역으로 하나님이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이방의 집권자들을 당신의 재판정에 세운 겁니다. 그리고 절대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의 종인 바울을 그 법정의 하늘의 전권대사로 하나님이 세웠던 것입니다.

유대의 눈으로 보면 바울이 죄인으로 심판을 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영적인 면에선 상황이 뒤바뀌어 전개 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대리자요 종이요 사환으로서 주의 명령에 의해 불신앙적인 유대와 이방의 집권자들을 위시하여 신령하게는 온 세상의 죄인들을 이 재판정에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하며 그렇게도 고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가 믿어야 한다는 것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 대속의 비밀과 부활의 영광을 너희들도 동일하게 나와 같이 맛보아야 된다고 하는 복음의 선포와 천상의 법정적 선언을 바울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과 같이 이러한 믿는 자의 정체성과 신앙에 대한 절대적 당위성과 담대함이 없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십자가 밖에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인생들을 어떻게 보았냐면 그것은 죄인들의 집합소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지옥 갈 인생으로 보았고 사단의 하수인이요 졸개로 보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 있는 자는 십자가 안에 있는 자를 무시하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밖에 있는 자들을 서로 만물의 찌기 같이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역사와 천국의 역사, 세상의 질서와 천국의 질서는 서로 상충하고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인생들과 그들의 삶이라는 것은 옥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비록 바울은 이 세상의 힘에 몸이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구속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옥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바람으로 상징합니다. 바람은 임의로 불며 또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바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은 옥에 가도 옥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을 붙잡아놨던 세상의 권력자들이 오히려 옥에 갇힌 인생들이었지 바울은 옥에 갇힌 인생이 아닌 대 자유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이 법정에서 무엇을 보여 주고 있냐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고발하고 이방의 권력자들이 심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죄와 사망권세의 고소와 정죄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와 사망권세의 고소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보기 위해서는 선지자의 글에 나타나 있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법정에서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법정적 선언을 아무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태초 이래로 출생되어진 모든 사람들을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심판하실 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죄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구주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을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와 이방이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바울과 같이 우리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 고난 배후에 있는 천국의 영광이 또한 우리 마음에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권세 있게 이 세상에 선언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멸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몸과 영혼을 멸하시는 이를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언자인 바울이 재판정에서 아그립바에게 질문한 말이 곧 하나님의 심문이요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말씀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보면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날에 이에 대한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말이 곧 심판이요 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의 말씀을 우리 마음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믿지 않고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도 그를 거절하실 것이라는 이 심판의 법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실 아그립바는 이 법정에서 최고의 지위자로서 세상 지위와 명예,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자였지만 동석한 자신의 여동생 버니게와 불륜과 근친상간을 벌인 흉악하고 더러운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예수의 정결한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울의 질문을 거부하고 비아냥거리는 말을 합니다. 속이 맑지 않고 거짓된 겁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활동했던 그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지 않고 대부분 거짓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 비진리에 속한 신불신간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얼마나 거짓된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만이 참으로 진실한 자며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사람을 볼 때는 외형적으로 판단을 안합니다. 예를 들어 TV에 어떤 이름 있는 명사가 나와서 인격적으로 최고의 절제된 감정과 자기를 비운 겸손함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저는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세상적 수준에서의 의인은 될 수 있어도 천국의 의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타종교의 성직자요 더 나아가 개신교 목회자라 할지라도 저는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생애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죄된 인간은 얼마든지 자신을 경건하게 가장하고 또 이 세상에 거한 비진리의 사람은 불신자든 종교인이든 얼마든지 자기 스스로를 의인화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꾸미는 것이 불신자건 타종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상관없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 이라고 성경은 지칭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얘기를 합니다.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 얼마나 경건한 자였으며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종교지도자였으며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특출 났었던가, 그러나 나는 성자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를 때려잡는데 선봉장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니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심, 만인에게 인정받은 모든 것들이 다 똥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얘기하지 말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소리는 다 잡스런 소리다. 이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재판정에서 역으로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을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으로 인해 진실과 맑고 순수한 영의 세계에 들어가 있지 아니하면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영혼에 불과한 겁니다.

바울은 참을 본 자며 하나님의 정직한 영을 받은 자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쇠하는 자 같았지만 영원한 삶을 살았고 그의 고난과 죽음의 신앙은 절대적 생명력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춰져 있는 천국의 권세와 능력을 송두리째 받은 자였습니다.

바울을 죄인 취급하여 고발하고 심문하고 재판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이방의 권력자들은 당시 세상의 권세를 갖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세상적 권세는 다 쇠하여졌습니다. 누가 이들의 이름을 지금 기억하며 누가 지금 화려했던 과거의 수천년 전의 이들의 번영을 기억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죄와 죽음의 권세에 삼킨 받은 자들이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흐르는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선진으로 오늘도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나라는 망해도 오직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흥합니다.

세상과 천국은 정반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왔을 때 유대인들은 그 분을 ET처럼 취급했습니다. 낯선 괴물로 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는 존재요, 세상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가 됨이 마땅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슬로건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사실과 오늘날 부패한 현대 교회가 유념해야 될 유일한 일이란 초대교회로 다시 또 돌아가야 하는 것뿐입니다. 현 기독교는 지금 초대교회의 시대와 영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시키면서 이때 형성된 가톨릭은 천년동안 복음을 변개시켰고 왜곡했습니다. 그 후 종교개혁의 역사가 시작 됐는데 종교개혁의 기치가 무엇이냐면 당시의 교회를 초대교회의 원상태로 돌려놓자 였습니다.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진정 순수했던 때의 두 축은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다시금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슬러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시대가 다르고 편하니까 이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당했던 수난의 때와 그들의 영적세계는 그 시대의 일이요 지금 우리와는 별개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시선은 바울이 경험했던 그 곳에 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서 선교를 열심히 한다 할지라도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그 고난 안에서만 맛보아 알 수 있는 천국의 참된 내적영광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공허한 이름만의 교회와 신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에서 유대교의 반그리스도적 종교의식과 관습과 통념 그리고 로마 제국의 적그리스도적 정치권력을 심문하며 재판하고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는 바울은 평안한 자가 아니나 바울은 참 평안을 알았던 자였습니다. 평안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복음에 위배되는 인간의 주의와 생각 등이 십자가에 못 박혀 마음에서 멸절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으라고 입에 사탕 발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체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자유한 자였습니다. 모든 억압의 사슬을 마음속에서 다 끊어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해 심문을 당하는 장소에서도 오히려 그는 세상을 심문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처한 상황만 제외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이 복음의 사람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정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바울이 있었기에 오늘 예수를 믿는 후세대의 사람들인 우리도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있음으로 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 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말로만 예수를 믿고 형식적인 신자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잘남과 우리의 힘으로 천국 역사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오니 은혜 주셔서 복음의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넉넉한 믿음의 소유자들로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바울이 이전에 율법아래 있었을 때는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또는 남다른 종교적 열심을 가져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고 착각을 했었지만 그런 육신적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빛 앞에서 다 무너지고 난 이후에는 오직 주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 하겠노라고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 사랑의 주님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진정 경건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런 삶을 살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위로하고 권면할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도록 축복하시고 저희들에게 생명의 빛이 충만히 비춰져서 세월이 어떻게 지나가든지 또한 세대가 어떻게 화해가든지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여 마음과 뜻이 일치되어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와 복음을 증거하고도 남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로 승리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풍성한 은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장8-9절

 

 

 

 

 

사람은 누구나 모두 육신적으로 편하게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천국을 주목하고 만지고 맛본 후에는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그들 인생의 최고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 상에서의 싸워야 할 핵심적인 싸움의 내용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해 드리는 것이냐? 아니면 나를 나답게 대접해 달라는 요구냐? 의 싸움인 것입니다.

대개 은사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의 신자일수록 하늘을 찌를 듯 하게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무척 빠른 속도로 능력 있게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복과 만사형통을 위한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시에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진심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해서 마음가죽을 찢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 같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아닌 그리스도의 머리를 붙들며 계시의 믿음을 가진 자도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거두어 주신다면 하나님의 일을 지금보단 훨씬 백 배 잘 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네 은혜가 족하도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는 순종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울과 같이 어린 양 되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삶입니다.

요한복음17장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자기 생각, 자기 열심, 자기감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느냐?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현대 교인들의 문제점은 세상과 천국을 혼동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임금이시고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백성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와 영원한 가치를 붙잡아야 하고 몸은 비록 세상에 있으나 세상 원리와 질서에 동화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항상 진리의 성령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한 개인의 신앙의 근거는 흔들리고 교회의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는 내가 그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고 정 반대에서 보면 왼쪽이 오른쪽으로 보이고 오른쪽이 왼쪽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곧 사망이 생명 같고 생명이 사망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히브리서11장26절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고로 성도가 지녀야 할 천국의 보화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돈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 천국의 보화를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속한 그 아무 것도 손에 쥔 것 없어도 이 십자가만 지녔으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밤은 암만 밝아도 밤 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만사 O.K 형통이라 해서 절대 세상이 천국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지자인 엘리야는 갈멜산상에서 팔백오십 대 일로 영전을 벌이고 하늘에서 불을 끄집어 도랑을 훑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왕과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로뎀나무 아래에서 너무 힘에 겨워 죽기를 자처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 9절에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말하기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략이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인의 눈에 진리로 인해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그리고 만물의 찌기같이 비방을 당해야 합니다. 여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한 신분상의 명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이 거룩한 목표와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들임을 잊지 마시고 미련한 자 같으나 지혜로운 자, 망한 자 같으나 흥한 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죽는 자 같으나 영원히 사는 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진리가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인 상태가 세상입니다. 또 세상이 바로 사망 그 자체입니다. 고린도후서1장10절에 바울은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신 것만으로 저희들 풍성한 은혜인 줄 알게 하옵소서.

그것으로 인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좌우되지 않게 하시고 영적으로 언제나 우리들이 천국의 부요한 믿음의 사람들 되었음을 깨닫고 마음속에 이 사실을 간직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진리로 인해 참된 풍요를 배우며 어떠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을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이 땅에서의 복된 증인의 삶 살아가기를 원하옵나이다. 감사하옵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빛의 자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에베소서 5장8-9절

 

 

 

 

하나님은 그 자체가 빛이십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는데 이 빛은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죄로 가득한 어둠의 세계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빛을 비추셨는데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참 빛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내 발의 등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는 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빛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십니다. 사람은 인생의 바른 행로를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척을 분간 못하고 갈 길을 몰라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오늘 이 세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라는 빛을 비춤 받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향로와 목표점을 알고 인생길을 걸어가므로 삶이 비록 외형적으로 힘들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지치거나 피곤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해석해주시고 성령의 조명과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의 노정에 불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가는 길에 있어서 말씀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등과 빛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빛이 있어서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면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인생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빛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빛으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들이 옳게 인식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영혼들이 주님이라는 이 빛을 보고 새 생명으로 화해가는 것을 기독교에 있어서 빛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4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라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이라는 것은 죄와 영적인 무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죄와 컴컴한 영적 어둠에 갇혀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과는 거리가 전혀 멀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과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에 혼돈 속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헤메이는 영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의 삶은 어떠한 것이냐? 했을 때 그것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내용은 고린도후서 4장 5절,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를 나타내고 우리의 자랑을 전파하며 우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알리고 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곧 우리들의 삶의 목표점이요 지향해야 할 바 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잘 아는 신자의 삶이 즉 빛 된 삶인 것입니다.

“어두운데 빛이 비추라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6절까지에 말씀 했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 했을 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단순히 신의 외적인 형상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얼굴에 있는 ‘이목구비’가 할 수 있는 기능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는 귀와 눈과 입과 코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사람은 듣고 보고 먹고 맛보고 숨을 쉽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우리는 그 주님의 얼굴과 모습을 닮아가야 하고 주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맛보시고 숨쉬시는 그 모든 감각을 우리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신앙의 정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시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축복중의 축복이요, 영광 중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 빛을 받아서 살아가는 자녀들인데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이에 관해 어떤 자격과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에게는 빛의 자녀로서의 당당한 조건과 자격이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에 어둠이었던 우리, 어둠에 속하였던 내가 변화되어서 빛의 자녀로 바뀌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말을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까 단순히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것이 빛된 자녀의 삶의 목표요 결과라고 이해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출세와 성공, 또 세상적 영광을 가지고도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살아가는 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에 반해 이름 없이 세상의 출세와 성공 없이도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잘 믿고 빛의 근원자 되신 이 분을 잘 따라감으로 인해 사회적 세상적 입지조건과 역량이 없어도 참된 신앙의 인격과 성숙으로 빛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바르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빛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말하는 것인가? 했을 때 그것은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또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자세히 주의한다는 겁니다. 즉 자세하게 주의하고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것을 얘기 합니다. 부분적으로 보고 지엽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요컨대 전체 문맥을 보고 앞뒤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개의 교회들은 심방을 다닐 때 교인이 개업을 하면 축하를 해 주러 성구 액자를 가지고 방문합니다. 그 성구 액자를 보면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든지 아니면 “이 집에 복이 임하리라”라는 말씀이 주류를 형성하고 오늘날의 교회들은 심방시에 이런 내용의 성구액자를 건네주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전체적인 앞과 뒤의 문맥을 연결해서 이해하고 깨달아야지 전(前) 과 후(後)를 잘라놓고 보면 다 인간적인 입맛에 맞는 해석이 됩니다.

그것이 참으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 구절과 구절이 단순한 차원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의 깊이 있는 내용을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실패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있어서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큰 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에 연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연륜이 있고 경험이 많으며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매사에 있어서 단순하게 결정 내리거나 눈앞에 있는 것만을 따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체 우주를 경영하시는 분이십니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신앙적 행위의 중요한 덕목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전체 우주를 경영하시는 그 넓은 구속섭리에 관한 영적 안목과 일 하심을 우리가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시각을 닮아가고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닮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앞뒤 생각을 하지 않아 용감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육적인 신자들은 늘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어도 단순한 사고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기 생각을 걸어놓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언제나 시야가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짧은 영적 식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냐 하면 무모함을 가져다주고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를 날라다 줍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는 육신적 일에만 연연하고 급급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에 연연하고 급급해하는 믿음은 넓은 영적 식견을 쌓아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그 좁은 세계 그리고 그 협소한 체험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이 관망하시는 그 넓은 구속의 역사와 영적 세계를 간파하고 그 분 만의 고유한 시간을 자신 안에 담아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는 먼저는 지혜롭게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는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월이라고 하는 말은 ‘카이로스’라고 하는 말로서 시간의 길이를 말하거나 일반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시간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이고 헛된 시간은 버려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고귀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엑사고라조’라는 말인데 ‘속량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피 값 주고 사신바 된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물로서 이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 우리의 시간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과 먹고 마심과 생각하는 그 시간들, 우리의 일상적인 취미의 그 시간들, 문화생활 하는 것, 공부하는 것, 가정주부로서 가정의 삶을 꾸리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시간 안에 삼킨바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을 지탱해 나갈 때 우리의 것이라는 것은 조금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과 하나님이 주신 우리 생애의 시간들을 아끼면서 살아가야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면 “하나님이 죄와 사망권세에서 나를 속량해주시고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주셔서 나를 사셨다.” 그러므로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하고 또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해 나가서는 아니해야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굉장히 악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여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됩니다. 이 악한 세대를 우리는 답습하거나 닮지 아니하고 하나님 주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아니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 주님의 시간으로 언제나 바꾸어 나가 세월을 아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질적인 시간을 항상 값지게 생각하는 우리의 영적인 각성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빛 안에 있어야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면 새 술에 취함과 같은 것입니다.

새 술에 취한다는 것은 자기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정신, 자기의지, 자기 뜻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마음과 생각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을 새 술에 취한 것이라 하고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나도 예수로 인해 살리움을 받고 남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리움을 얻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곧 신자가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각과 정신과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빛은 거울을 비추면 그 거울에서 반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거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체 입니다. 그리고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다양한 색들의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여러분 각자 한 분 한 분이 독특한 신앙의 빛을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 렌즈를 통과하면 그것을 통해서 불이 피워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통해서 거룩한 믿음의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말과 헛된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 대신에 감사의 말과 진실의 말을 해야 합니다. 빛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 주시는 그 생명과 은혜 또 영적인 신령한 복을 받으면서 감사의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진실의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이 곧 ‘영’이기 때문에 영적인 변화와 속사람의 달라짐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있으면 정직한 영을 소유하여 진실한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서 빛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요, 마음을 통해서 빛을 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2절에서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말씀을 눈에서 떠나게 말고 마음속에 지켜야 된다”고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처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어둡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늘 읽어야 됩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빛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어두운 영혼이 변화되어 밝은 영혼이 됩니다. 천국이라는 세계는 빛의 세계요 조금도 어두움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시적인 천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신자가 먼저 심령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 그 빛 된 말씀 속에서 준행하고 늘 걸어 다닐 때 또 무엇을 생각해야 되냐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생각하여 빛을 나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북한 인민들은 주체사상에 입각해서 죽은 김일성이라고 하는 자신들의 수령과 그의 아들, 현존하는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까 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부분을 역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빛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영적인 조명을 받고 묵상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성도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해야 됩니다. 자기 자아라는 그 실체가 있으면 주님의 빛을 가리우게 되어 있습니다. 빛을 발하고 나타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 분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 내야 합니다. 곧 겸손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육의 속성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안에 비춰지면 자신이 완전한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랑이라는 것은 조금도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만 자랑하고 주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참 신앙의 모습은 나의 빛, 나의 영광, 나의 자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랑과 영광과 의와 그 분만을 드높이고 빛내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들어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쓸모없고 작고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죄인이며 헛되고 헛된 삶을 경영하고 사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죄인인가가 발견될 때라야지 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고 물리칩니다. 그리고 갈 길을 밝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참된 광명, 그리스도의 참된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그 빛의 세계를 직시하고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볼 때 이 빛을 더욱 더 사모하고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빛은 따뜻합니다. 빛이 없으면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지구에 만일 빛이 없어 춥고 어둡게 되면 식물과 동물과 인간 그 어떤 것도 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신자인 우리도 우리의 영혼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라는 생명의 빛,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빛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한 기쁨과 참된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9절에 빛의 열매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는 착함이요, 두 번째는 의로움이요, 세 번째는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이 세상에서 바보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간교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육신적 형통을 위해서 남을 짓밟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험악한 세계에서 그에 반해 신자가 예수의 착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바보같이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침해와 조롱과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본을 보여주심 같이 한 마리의 순한 양되어서 이 거짓된 세상 가운데서 악과 불신앙을 갖지 아니하고 착한 성도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눈앞에 불이익이 있고 아픔이 있고 또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놓인 자, 빛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고 갈구하는 사람은 착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경적 의로움입니다. 성경적인 의로움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 의’의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적 의’라는 것은 저마다 상대적이고 개별적이며 이기적인 것이고 절대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이득과 생각이 맞으면 불의가 정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 편견, 고집,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의’를 따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투쟁과 충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의로움’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절대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기준 삼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상대적인 평가나 해석, 가치나 규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셨던 절대적인 십자가의 삶,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또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인도함 받는 것을 원하는 소망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로움을 소유해야 됩니다.

그리고 진실함으로 나아가는 인격을 소유해야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도 세상적 기준의 진실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 절대적인 진실의 주체자, 이 분을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실하지 이 세상에 어떤 사람 또한 어떤 것에도 진실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적 진실함’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영을 소유한 자는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과 행위가 성령 안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면에서 바라보면 이 분은 지금 말씀드린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사역 당시에도 유대교인들의 많은 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착하다거나 의롭다거나 진실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못된 나무, 거짓과 불의한 열매 그 자체로 봤습니다. 성령 안에 거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나무로 보고 착한 열매로 봅니다. 또한 의로움의 나무와 열매로 보고, 진실함의 나무와 열매로 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속하고 빛 안에 거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착하신 분이요 의로우신 분이요 진실한 분으로 보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되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본 것이 아니고 이들이 육에 속하고 거짓 안에 거하고 불의한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이렇게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분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는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절대적인 차원에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손가락질 받고 또 불의 하다고 손가락질 받고 거짓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하나님만이 인정해주시는 진정한 착함과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 1장 5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은 빛이시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빛 된 자녀로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란 빛에 속했냐? 어두움에 속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빛의 자녀가 되고 싶다면 여러분들은 빛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의 열매를 맺어 갈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생명의 진액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의 진액을 받아서 인격이 새롭게 창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과 은혜와 함께 하심이 있다는 것을 증거로서 나타내고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이 다 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 우리의 어떠한 것으로도 빛을 이룰 수 없고 아까 말씀드렸던 요한복음 8장12절 말씀처럼 세상의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만 우리는 빛을 얻을 수 있고 빛 된 열매를 맺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복과 은혜와 기쁨으로 여러분들은 이 어두운 세대 가운데에서 빛을 발하며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 말씀과 성령의 빛 안에 항상 거하시고 믿는 자의 아름다운 신앙의 자태를 드러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빛의 자녀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어두움에 처하는 자였음을 우리가 발견하였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흉하고 더럽고 추한 인간들이었던 가를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 빛이 비추어졌던 자리에 서서 빛을 의지하고 빛만 바라보게 하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빛만 따르고 의지하며 이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열매를 맺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저희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생명 주심을 통하여서 빛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는 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가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모든 일들을 바라보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넓고도 넓은 그 하나님의 마음의 눈을 닮아 나가게 하여 주셔서 총체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또한 소망하옵나이다. 빛 가운데 거하여서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만을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의 진정한 마음과 거룩한 근심이 있게 하여 주시고 빛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치며 성령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 성숙한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신적역사의 참여자

 

 

 

 

“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고핫 자손이 회막 안의 지성물에 대하여 할 일은 이러하니라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맡을 것은 등유와 태우는 향과 항상 드리는 소제물과 관유이며 또 장막 전체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성소와 그 모든 기구니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할 일과 그가 멜 것을 지휘하게 할지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민수기 4장1-20절

 

 

 

 

우리가 함께 본 민수기 4장 1절에서 20절 말씀에는 레위지파 중에서 고핫 자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의 성직의 의미와 성소 안에서의 책무에 대해 설명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본문 말씀에 의거하여 살펴볼 것은 고핫 자손의 조상 고핫이 누구냐는 겁니다. 여기서 고핫은 다름 아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의 할아버지를 말합니다.

고핫 자손들은 레위지파 중에서도 특별하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성막을 관리하고 또 성막 안에 있는 증거궤 라든지 진설병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성별된 책무를 지닌 성막 봉사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 초반부에 보면 이스라엘이 레위자손 중 고핫 자손을 택하여서 집계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이 고핫 자손 중 30세부터 50세까지의 연령층을 선별하여 뽑습니다.

우리는 항상 구약을 읽을 때에는 신약과 연결해서 모형적 예표적 사건으로 이해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에서 구약과 신약의 두 구도를 모형과 원형, 그림자와 실체로 대비하여 구약에 이미 표상적으로 신약시대를 연 하나님의 보내신 자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적인 사역 등이 담겨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민수기도 그러한 차원에서 접근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레위자손 중에 고핫 자손을 집계해서 고핫인들을 뽑을 때 30세부터 뽑는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도 30세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 한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지내시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 대속의 위공을 이루시기 위하여 천국복음을 30세부터 전하시며 그 귀한 신성적 직무를 시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 고핫 자손들 중 30세부터 50세까지 가장 일 잘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거룩한 직무를 하도록 성막관리 봉사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핫 자손들은 구별된 자들이요 하나님의 책무를 입은 빼낸바 된 지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역은 어떠한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여야 하는데 마침 이 고핫 자손들이 성막기구를 운반하는 내용이 이 민수기 본문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바로 휘장이라든지 해달 가죽이라든지 순청색 보자기, 홍색 보자기, 자주색 보자기가 나오는데 고핫 자손들이 이것들로 성막을 관리하고 기구들을 싸서 운반을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진영을 벗어나서 전진하여 움직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고 따라갔습니다. 그 진영이 전진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규례와 양식과 법도를 오차가 없이 다 지켜내면서 휘장과 해달가죽과 순청색보자기와 홍색보자기와 자주색보자기로 성막기구를 덮거나 채를 꿰거나 싸서 일을 마치면 고핫 자손들이 그것들을 메고 나릅니다.

그렇다면 휘장과 해달가죽과 순청색보자기와 홍색보자기 자주색보자기는 무엇을 의미 하겠습니까? 첫째로 휘장은 마가복음 15장 37에서 38절까지의 말씀과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막 안에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찟겨 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예수의 육체입니다.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의 육체가 못 박혀 찟겨 짐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보고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사람은 지성소에 아무라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지성소라는 영역은 거룩하고 흠과 점과 티가 없는 신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일년에 일차씩 대제사장만 한번 들어갔습니다. 이 대제사장외에 다른 사람이 그 곳에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휘장이 십자가에 찟겨져서 무너짐으로 사람들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달리신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이 죄악세상 저 너머에 계신 하나님과 조우하고 은혜와 영생을 맛보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해달 가죽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인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해달 가죽은 비바람에 찌들고 모진 바람에 때가 절은 돌고래 가죽내지는 여타의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의 가죽입니다. 참 별 볼일 없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 별 볼일 없는 가죽이 성막이라고 하는 텐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기구들을 썩거나 녹슬지 않게 보호해 줍니다. 또 광야에서의 비바람과 먼지를 막아줍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인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 인간의 똑같은 성정과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분의 삶은 참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지위와 부란 없이 그야말로 흠모할 것 없는 가난한 자요, 무학자인 분이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이분을 예언하며 묘사하길 고운 모양도 풍체도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해달가죽이 지니고 있는 속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쇠하거나 썩지 않게 할 영원한 생명의 왕,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으로 말미암는 대속의 능력이 오늘의 교회와 성도의 신앙이 탈선되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이 광야 진영에서 나갈 때 고핫자손들은 순청색 보자기에 성막 기구들을 싸서 움직이는데 이 청색 보자기는 푸르고 맑고 빛나는 하늘을 표상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지고하시고 거룩하신 신성을 상징합니다.

네 번째로 홍색보자기는 붉은 색을 나타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람들이 구원과 의와 영생을 얻습니다.

다섯 번째로 자주색 보자기는 왕의 법복인 자주색 옷을 의미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왕 같은 제사장의 인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신성한 기구, 등대, 불집게, 물두멍 등은 이들 휘장, 해달의 가죽, 순청색, 홍색, 자주색 보자기로 덮거나 싸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막은 어떻게 덮어지느냐? 출애굽기 26장 14절에 나와 있는 성막을 덮는 덮개의 모습을 보면 맨 안에는 그룹이 새겨진 앙장으로 텐트인 성막을 덮습니다. 그리고 그 앙장 위에다가 염소 털 덮개로 또 덮습니다. 그 다음에 붉은 물을 들인 수양가죽으로 덮고 맨 나중에 이 본문말씀에 나와 있는 해달가죽으로 덮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라고 했을 때는 건물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고 우리 각자 각자 한 사람이 주님의 몸이요 지체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에 나와 있는 성막도 신령한 주의 성전인 우리와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가령 성막의 촛대를 단지 구약시대 성막 안에 촛대가 있었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오늘 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빛을 발하는 촛대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성막에는 물두멍이 있는데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영원한 생명의 물이라고 하셨으므로 바로 성막의 물두멍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진리의 물두멍에 영혼을 씻어야 깨끗해 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나와 있는 성막은 신약의 예표적이고 모형적인 것으로 오늘 우리가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내면을 영적으로 단장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을 내 심령 안으로 끌어 당겨야 됩니다.

그런고로 구약 성막도 우리 자신과 우리 신앙과 내면의 영적치장을 위해 성막의 식양과 그 안에서의 규례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막 겉에는 해달가죽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것을 더 부연설명 하자면 예수님은 천국의 임금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자연계와 초월적인 모든 세계의 주인이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는 물리적인 정치력이 있어서 유대 밖 이방세력을 척결하고 이스라엘을 단숨에 재건하는 강력한 다윗왕권의 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공생애 사역당시 들에 나가서 몇 마디 전하고 병자들이나 고치고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렸고 또 바리세인들에게 바알세불이다, 나사렛 괴수의 이단이다, 라고 박해를 받고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가 십자가에 자기백성들에 처형당하신 외형적으로는 초라한 분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회 정치개혁가 내지 혁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교의 윤리적인 율법적 교사도 아니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자 참 보잘 것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이 십자가에서의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죽음 안에 하나님의 무궁한 생명의 영적세계와 능력과 진리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겉으로 보면 세상적으로는 이익이 안되고 건질 게 없습니다.

이 십자가복음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자기 이성적 잣대로 바라보면 이 성경말씀은 모순덩어리요 빅토르 위고나 톨스토이가 쓴 문학작품에 비교해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 안에는 인간이 가히 상상 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진리의 세계가 있습니다. 곧 진리의 바다, 진리의 대해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겉에서 보면 하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돈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 권력을 거머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이런 복음의 생리를 바꿔치기 해서 예수 믿으면 범사에 무조건 잘 되고 형통해진다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성경에서 잘 되는 것의 의미란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사랑의 인격을 덧입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려면 하나님의 사람은 십자가에서 매일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끝없이 세상으로 뻗어있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적 사고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것 뿐이요, 이것만이 오직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진리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가 그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시고 증명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란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삶이 못에 찔리는 것처럼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것이 인간이 걸어야 할 인생의 길 중에 가장 존귀한 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해달가죽 안에는 붉은 물들인 수양가죽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보혈의 피를 아낌없이 흘리신 예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수양가죽 안에는 염소 털 덮개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신데 당대에 비 진리의 세력으로 낙인 찍혀서 정통 유대교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즉 그들로부터 저주 받으며 낙인이 찍힌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틀린 말 하지 않았습니다. 바른 말씀만 증거 했고 천국의 진리를 더하거나 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 이 자칭 정통주의라 했던 종교집단이 예수를 상징적으로 염소 취급했습니다. 예수를 염소로 폄하했지 하나님의 어린양 구세주 취급 했던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대신하여 의미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염소같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대속을 옳게 믿고 받아 드리는 자는 수양 가죽이 염소 털을 덮음 같이 예수의 은혜가 믿는 자의 허물을 덮음으로 염소 같은 신자가 되지 않고 양 같은 신자가 되고 가라지 같은 신자가 되지 않고 알곡 신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막 덮개에 세 번째로 감추어져 있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깊숙이 감춰져 있는 성막의 덮개인 그룹이 새겨져 있는 앙장은 거기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늘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 기구를 살펴보면 진설병 상이 있는데 그 떡 상은 성막기구 중에 가장 길이가 짧습니다. 그 상에 떡이 열두 덩이 진설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기구 중에 이것이 높이가 제일 낮습니다. 이 진설병은 사이즈가 1규빗 반밖에 안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75cm에 불과한 매우 낮은 기구 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상을 낮게 만들었겠습니까? 높게 만들어도 무방할 터인데 그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 상위의 떡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떡, 영혼의 양식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서 요한복음 6장 31절 말씀 이하에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보배로운 산 떡이다.” 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사람은 육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혼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먹을 때는 신자인 우리 자신이 낮아져야 됩니다. 우리 자아가 부정 되어져서 낮아지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영혼의 양식인 말씀이 살아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선입견, 내 고정관념, 내 이성적인 교만 등이 있으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지 않습니다. 겸손히 말씀을 받고 내가 십자가에 달려져 하나님 앞에서 낮아졌을 때 생명의 말씀은 내 것이 되어서 영혼이 강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설병상이 낮게 설치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말씀을 보면 고핫자손이 진영을 떠날 때 어깨에 오늘 설명한 이 성막 기구들을 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역의 희생과 수고를 짊어지신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 1절에서 11절 말씀을 보면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에다가 법괘를 얹어서 옮기는데 수레를 끄는 소가 요동치니까 법괘가 흔들린 겁니다.

그 때 아차 싶어서 웃사가 그만 법괘에 손을 대서 여호와가 진노하여 웃사를 쳐버립니다. 여기서 알아야 될 사실은 법괘는 메는 것입니다. 짐승의 수레에다가 법궤를 얹으면 안되고 새 수레에다가 얻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정통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양식을 잘 따라가는 것이어야 하고 십자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의 성도들의 신앙이란 십자가를 메는 신앙입니다. 즉 어깨에 걸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헌신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법궤인 성경말씀은 거저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만 값진 교훈이 주어지기 때문에 어깨에다 메는 것이지 사망과 생명의 법, 심판과 구원의 법이 들어 있는 말씀그릇인 성경을 편하게 믿어 보려고 짐승의 수레에다가 얹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짐승인 소가 끄는 새 수레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궤를 수단과 방법을 달리해서 나르고자 하는 편리하고 인위적인 대체도구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심판의 법이 담겨있는 십자가나무로 만든 언약의 그릇인 법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을 말씀답게 대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 내지는 신 현대주의 신학은 바로 이 짐승의 새 수레와 같습니다. 이들은 합리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학의 새 수레로 하나님의 법궤인 성경을 나르려고 하고 또 성경에 함부로 손을 댑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에 하나님과 진리가 없는 사람들을 짐승으로 규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혼의 소유자들만 성경은 온전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소는 구약 율법역사를 대표하는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짐승 같은 인간들이 앞에서 끌려고 해서도 안되고 율법적 의식으로 대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임의로 손대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막 봉사도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모든 양식과 규례대로 행해야지 함부로 손 못 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성경을 봐야지 자기 육신적 사고로 성경을 손댔다가는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자기 임의적인 해석과 자기주관에 의한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 따위 등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규례대로 성막기구를 어깨에 메야하는 고핫자손처럼 십자가의 말씀을 우리 어께에 걸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한 수고와 희생과 헌신 그것은 겉으로 보면 어려운 것이지만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나의 멍에를 메는 법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그리고 나의 멍에를 메는 법은 참으로 가볍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나지 않은 자들은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짐처럼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진리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요 남들이 가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가벼운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주의 백성들이 지닌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고핫자손이 성막기구를 멜 때 사람들이 봤을 때는 참으로 구질구질하고 하찮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핫자손들은 보자기에 쌓인 성막기구들을 애지중지 보물단지처럼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천 보자기를 풀면 금빛 찬란한 성막의 기구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무궁무진한 천국의 빛과 영광이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이 이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따르고 진리를 믿으면 믿을수록 이 고핫인들의 임무처럼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를 믿는 것이 무거운 짐 같아 보이고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묵묵히 십자가를 걸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과 심령 안에 감춰져 있는 천국의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여러분들의 생은 결단코 고달프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우리는 입술로 시인해야 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걸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것입니다. 고핫자손의 책무와 사명을 우리가 본받아 그 영적 반열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면 “고핫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고핫자손이 성소에 들어가 지성물에 접근 할 때 잠시라도 성물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항상 우리의 영적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만나려고 하고, 내가 주님 제껴 놓고 직접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하고, 내가 주의 마음을 품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기도하려고 하고, 이래서는 안되는 겁니다. 또 내 이름과 내 선함으로 직접 봉사하려고 하고 내 의지로 선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명령과 지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모든 것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직접이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철저히 믿는 믿음이 아니면 영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제 2의 고핫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십자가 신앙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의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수가 없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지 조차 모릅니다. 오직 그리스도 중심 할 때 진리에 관해서 깨달음이 있고 승리가 있으며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주셔서 이 광야 같은 적막한 세상에서 실족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믿음으로 전진하는 순례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늘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은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 된 마땅한 행실과 의무와 구별된 삶이 있도록 우리를 늘 인도하여 주시길 바라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귀한 믿음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누가복음7장1-10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7장 1절 부터 10절 까지 말씀에는 로마군대의 한 백부장이 나오는데 그 수하에 있는 종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 종은 병든 것뿐만 아니라 이 병으로 인해서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염려하는 와중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자기의 종을 구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요청에 의하여 그 하인을 고쳐주려고 했는데 마침 이 백부장이 예수가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임금 주님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는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이 백부장을 놀라운 사람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병든 종을 고쳐주기를 간청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또한 어떠해야 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반드시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향한 우리 성도의 각자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 것을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먼저 백부장은 종을 사랑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또한 알아봤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자 자신의 집을 오려고 하실 때에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예수님 이라는 분의 존재의 크심과 귀하심에 대해서 한 번에 알아봤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무한한 권세와 능력을 한번에 직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 당시의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적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들의 병이 낫게 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 신뢰감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신뢰감을 예수님께 표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생명의 권능을 알아보고 자신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동시에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는데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더이다” 하면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며 마음과 입술로 확정하고 시인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되신 것과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난 이 첫 사건 속에서 고백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한번의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소문만 듣고 주님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소문 하나 달랑 듣고 예수님은 자신의 ‘주’이시고 자신은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하면서 주종관계를 형성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 조차도 백부장의 믿음을 굉장히 큰 믿음, 놀라우리만치 귀한 믿음이다 라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이 백부장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이러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보냈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엿보아야 하는 부분은 백부장은 소문만을 듣고 예수가 주 되심을 알았던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눈으로 예수의 기적을 본 적도 없고 말씀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단지 소문 하나 듣고 예수님을 그냥 자신의 주로 모신 겁니다.

이게 확실한 믿음인 겁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 이심을 알고 그의 말씀 속에 구원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라사대 하는 말씀 속에 있는 우리의 구원의 보장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영원한 생명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말씀 중심의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의지하고 진리를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되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의 신자들처럼 먼저 복음의 말씀은 제껴 놓고 진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미와 전혀 상관 없이 단순히 이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양태와 형식을 따라서 목적이 어그러진 신앙생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원장과 부흥사들이 베푸는 “불 받아라” 식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그런 것을 기독교의 권세와 능력으로 착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적 이적을 바탕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현실적인 인생의 모든 난제들도 단순간에 해결된다는 식의 신앙관은 순 엉터리 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각색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생명의 왕이시요 권세자이시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근원적 내면 영적 실존의 모습이 여러 병자의 모습과 같은데 예수라는 영적 의원, 이 영적 치료자를 만나야 영적 병자인 모든 인간은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구원역사상의 샘플로 주님이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보여 주는 것은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들만 병자가 아니라 몸이 건강한 사람들도 모두 다 영적병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사건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의 치료가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완전한 생명의 구원을 보여주는 인간 영혼 구원에 관련된 영적인 일에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약하고 더럽고 썩고 추한 영적병자인 모든 인간 죄인들에게 거룩하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사랑의 성자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믿음이란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고 온전케 하며 죄인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올리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구원과 영생을 믿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신자의 믿음은 그리스도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계신 내 영혼을 수술하고 내 인격을 변화시키며 신의 거룩한 형상으로 닮아가게끔 하는 차원으로서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육과 관련된 믿음, 즉 육체의 치유와 육신 삶의 번영과 형통 등이 참 믿음의 본질이 아니고 말씀 안에 감춰져 있는 참 하나님의 본체 형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옳게 바라보고 믿는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함이 참된 신앙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그의 존재되심과 인격과 성품, 그것을 먼저 안 상태에서의 믿음을 신자는 지녀야 합니다.

백부장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를 바르게 인식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에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백부장은 로마 군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부분은 믿음과 구원은 사람의 혈통이나 그 어떠한 외부적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관과 그 시각에서 보면 로마 제국의 백부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 올 수 없는 자입니다. 그는 신분상 선민이 될 수 없는 이방의 더러운 자며 언약백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면 유대와 이방의 담을 허물어트렸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혈통과 육신의 계보로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 분이 어떠한 분인 것을 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참 이스라엘이 된다는 새로운 구원사건을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의 법으로 못 박아 규정 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 앞에 인간적인 시각과 제도와 종교적인 율례에 입각해서 서 계신 것이 아니고 백부장도 그런 형식과 외형적 겉껍데기에 의거하여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영적인 세계에서 교류가 된 겁니다.

백부장도 인간의 육신적인 사고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영적인 차원에서 예수를 이해했고 예수도 그런 백부장에게 영광 받는 주님으로써 작용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복음의 이치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이방인 같이 추하게 생각되는 개 같은 자들에게도 진행된다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백부장은 로마제국에서 나름대로 세상적인 힘을 가진 자였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세상을 지배한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보면 단지 로마 제국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유대의 백성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히브리 민족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도 아니고 유대 정통적 종교 세계에서 전혀 인정받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한 가난한 유대 청년, 가난한 목수의 아들 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로마 제국의 백부장과 예수님과는 신분상 게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로마 제국의 군지휘관이 이런 유대 사회의 한 일개 백성 밖에 안 되는 예수라는 젊은이를 ‘주’라고 모신다는 것을 로마 제국의 사람들이 알았다면 백부장도 어떤 면에서는 걸고 넘어지면 처형 대상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만을 숭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 외에 다른 왕과 신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

런데 이 백부장은 세상적인 권력, 자기의 위신, 체면과 자존감, 인간 사회에서 형성되는 모든 사람들의 기준과 시선, 제도적 힘 등의 것들을 예수 앞에서 다 한순간에 버려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와 대면할 때 천국 세계의 질서로 진입했기 때문에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영의 눈으로 바라봤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백부장의 믿음은 큰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 당시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 대단히 강성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로마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이미 이 세상 안으로 천국이 침입해서 진입한 것을 본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나라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임금이시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의 소문만을 듣고도 그 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평소에 유대인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어줬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심성과 내면적인 구조는 세상의 위선적 껍질이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도 껍질에 불과한 외형과 세상적인 물리력과 가치, 사람들의 시선 따위 등에 얼마나 좌우되고 휘둘립니까? 그러나 백부장은 이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기 위해 세상과 세상에 있는 현실과 싸우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최종적인 현실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삶의 마지막에는 한줌의 재가 돼버립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의 처절한 실존적 상황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분을 믿었을 때 더 이상 썩어짐에 종노릇 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이 세상안의 죽음의 현실 너머의 참된 현실 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과 세상의 사망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분과 함께 승리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근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모든 인생이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이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절대적 유일성을 반대하는 육신 세상에 깔려있는 세상 죄와 마귀적 사망의 힘의 구조질서와 반드시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단지 세상으로 기울어진 오늘날의 수많은 세속적인 교회의 신자들처럼 예수 믿어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한 육신의 좋은 환경과 형편, 잠시 잠간의 기쁨, 육적 안락과 행복을 얻고자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참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보이시지 아니하시는 보혜사 성령 안에 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이는 육신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 보이는 세상과 투쟁하는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보이는 육체 현실세상 가운데서 세상의 가치들을 붙들고 더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부인되며 죽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생명은 육신 가운데서 우리가 누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곧 이질적인 차원의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생명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들은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생명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그 생명을 반드시 붙잡아야 되고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와 구속의 법칙입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법칙이기 때문에 따라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간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부장은 한낱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세상적 힘에 지배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백부장 같은 위치 정도에 있으면 그런 명예와 환경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따위 등의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을 자랑 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자였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9장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인간에게는 돈이 지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고 위력 그 자체 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돈 맛을 아는 부자들은 더 그 돈이란 것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음 문제만 빼 놓고 웬만한 문제는 돈으로 다 해결되기 때문 입니다. 이렇듯 돈 가지고 안되는 일이 없기에 사람들은 돈을 의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 재물이 육에 속한 인간들에게 신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자는 예수와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돈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버리든지 아니면 예수를 외면하고 돈을 따라 가던지 해야 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어렵고 천국으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의 것들을 가지면 가질수록 천국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는 마음과 외부적 환경이 조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누구냐면 이 백부장처럼 웬만한 세상의 것을 모두 소유 했으면서도 예수 안에 있는 최고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보면서 자신을 낮춰 예수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이 진정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겁니다.

즉 세상적인 ‘권력과 부’도 가지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어떤 다른 것을 의지 할 필요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모습을 지녔다면 대단히 믿음이 좋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적으로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육신적으로 잘 되는 것보다는 안 되는 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일에 있어서 더 용이하고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가진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천하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 주님이 말씀만 하면 자신의 종도 낫는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한 경외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에 대해서는 그가 병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처절한 상황을 들여다보고 동시에 그 문제의 해결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세상의 갖가지 것들을 가져도 자신도 병을 앓고 죽게 될 자기 수하의 종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썩어짐에 굴복하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근원적인 인생의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경험한 자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능력과 권세가 나오고 그 분과 그의 말씀을 의지하면 참혹한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사람들이 교회만 오래 다녔다거나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을 지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십자가 중심의 신앙도 모르면서 직분을 가지고 충성과 봉사를 다하며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자기 신앙이 괜찮은 것으로 착각해서 스스로 교만과 자만에 빠지면 안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죄인들이고 악마의 자식들이니까 마음속으로 나만 못한 인간들이라고 하는 잘못된 현대적 선민의식 또한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후에 나보다 더 굳건한 믿음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백부장처럼 나라 바깥 자손이면서도 믿음으로 신령하게 나라 안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십자가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의 비밀을 본 자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믿음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영혼에 대한 선한 목적과 진실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 선한 열매를 드러냈습니다. 그의 선한 목적과 진실함 이것이 주의 팔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듯이 하나님의 마음은 늘 죄와 죽음과 어두움에 휩싸여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저 인간적 사랑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백부장도 느끼면서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곧 그의 믿음의 참된 가치는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아보았다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되심과 그분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한편 백부장의 종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미천한 존재로 보지 아니하시고 모든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백부장도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노예의 병을 고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자이시요 죄인된 인간의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백부장과 같은 이 믿음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종은 헬라어 원어로 ‘둘로스’인데 여기 본문에서의 종의 원어는 ‘파이스’라는 말입니다. ‘파이스’는 어린 아이라는 말인데 백부장은 이 종을 종으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이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KBS의 추노라는 드라마에 보면 이조 후기 무렵 노비들이 얼마나 양반들에게 학대를 받고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까?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의 노예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자기의 종을 자기의 분신처럼 사랑한 겁니다. 자기의 자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놀란 겁니다. 그리고 그는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복음을 믿는 신자로서 그리스도가 맡겨주신 구원의 소식을 알리며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이 지상에서의 지경을 넓히는 사역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무엇이 개입되고 전제 되어져야 하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는 삶 속에서의 인간적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이 없이는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바로 백부장은 예수라는 분의 소식을 듣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그 분의 마음과 교류하고 이미 통했던 자였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주님처럼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되었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한 영혼의 가치를 보면서 자비와 은혜와 구원과 생명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 힘을 의지하고 말씀의 대언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을 가졌을 때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일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살리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을 우리가 소유하여야 합니다.

백부장은 삶의 문제를 자기중심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육체와 상관된 이기적인 것들을 주께 간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종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던 자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과 마음을 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신령하게 간파하고 자신과 인간본연의 자아에 대해 잘 안 자였습니다. 왜 자신의 자아를 잘 안 자였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오신다고 하니까 “내가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이 백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라는 신분이 실상 주 앞에서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그의 진실한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자신과 비교 할 수 없이 더 높이고 “주께서 말씀만 하옵소서”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드높이고 그 분의 영적 권위를 높이면서 “말씀만 하시고 명령만 하옵소서” 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로마 황제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백부장은 알았습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꾸로 로마 황제와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를 오늘 성경 본문 사건의 정황 속에서 보면 그는 성령에 속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했습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도 예수와 진리를 믿는 자라면 우리가 신뢰하는 주의 생명의 말씀대로 되는 일을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구주와 구주의 말씀을 믿는 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님이 일하시고 움직이신다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영생에 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 만을 가지십시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백부장은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적인 일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인 여러분들의 삶 안에서도 중요한 영적 가치와 복음적 원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 그것을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이 백부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일과 천국의 일을 연결 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었습니다. 자신과 자신 수하의 종들과의 주종 관계 그리고 자신과 자신 위의 상관의 주종 관계를 가지고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상황, 우리가 지나가면서 보는 길 위에 풀 한 포기에도 천국의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그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 한 방울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맞닥뜨리는 현실 세계의 각종 사물들, 시간과 장소에서 빚어지는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천국의 역사와 연결시킬 줄 아는 믿음의 지식과 영적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현재의 삶에서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모든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모든 것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찮은 삶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상적인 모든 삶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모든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꼭 교회만 나와서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일주일에 몇 번 나옵니까? 한 번 아니면 두 번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평상시의 일반적인 삶을 잘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또 그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각자의 생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빛이 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한편 이 백부장은 예수를 거부한 유대 율법 학자들처럼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시라는 것과 자신의 하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믿음 사건을 보면서 이에 반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가운데서는 말로는 주님과 복음을 믿는다 하면서도 얼마나 실질적으로는 불신자들이 많은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안타깝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신자들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선입주견대로 예수를 알고 또한 그 자신의 육적 고정관념을 투영시켜서 참이 아닌 가짜예수를 마음속에서 만들어 놓고 상정하여 따라갑니다. 예수를 육체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의적이고 본능적 사고로 믿음생활 하는 거짓된 신앙인들을 일컬어 한 마디로 율법적 종교인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 안에는 이런 류의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복음적 신앙을 체험해 본바 없이 성경의 갖가지 좋은 성구 구절들을 다 따다가 종교적 정당한 명분을 앞세워 교묘히 연막을 쳐 놓고 철저한 투자 원칙의 슬로우건을 내걸면서 신도들에게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교회에다 열심히 갖다 바쳐야 된다고 나름 은혜롭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면서 설교하고 목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자신을 추종하는 군중들을 자기 교회의 열성적인 교세확장 전위대로 충성과 헌신을 다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영적 우맹의 신도들에게 허파에 바람을 넣어 주면서 또 어떻게 떠벌리냐면 갖가지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교회를 위해 심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보응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세상에서 육신이 건강하고 행복한(?) 부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 ‘건강과 부’의 선물을 반드시 아낌없이 부어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희망과 위안의 메시지인 것 같아도 이것은 교묘하고 거짓된 선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은 썩어 없어질 육체의 소원대로 건강하고 돈을 많이 소유하기 위한 부자가 되기 위해 조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을 가질 수 없고 외식적인 이름만의 신자 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빈에도 처할 줄 알아야 되며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합니다. 그리고 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된다고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최종 본심은 교계와 세속에서의 동시다발적 권력획득과 부, 자기영광과 육신의 자랑 이외에는 사실 다른 의도란 없습니다. 또 이들이 상상하는 내세천국도 지상의 계속적인 연장 선상에서의 물질적 육적 파라다이스 외에는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점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영혼 중심의 인격적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과 육신에 치중하여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 해결과 만족을 위해 교회를 다니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사랑 이라는 믿음의 본질을 붙잡는 귀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늘 요청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 시대의 많은 죽어있는 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크고 위대하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백부장은 주님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노라 했습니다. 사실 주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했지만 그가 여러모로 잘나서가 아니고 그의 믿음이란 것도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을 가진 자가 받는 칭찬도 하나님께 그 영광이 돌려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주의 존재와 말씀 앞에 자신의 초라한 내면적 실체가 다 드러남으로 주 앞에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의 주님의 밝은 빛 앞에 자신의 못난 전인격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더욱 더 존귀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삶에 있어서의 상관과 종의 상하 신뢰관계를 예로 들면서 자신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그 당위성을 주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생각, 그리고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만 따르겠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백부장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 하시는 가로 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채워달라고 하는 믿음이 되면 안됩니다. 또한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오직 유일한 신앙 삶의 목표요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깨달았나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옳게 인식하고 깨닫는 믿음을 갖도록 돌보아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전적으로 도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심 앞에 낮아지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가 될 수 있게 축복해 주시길 기도하옵나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에 많은 불쌍한 영혼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 안에 놓여 있지 않고 이 세상의 육신적 고통에서 신음하는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이 주님의 그 크신 구원과 사랑을 늘 요청할 줄 아는 지각 있는 성도가 다 되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고 바른 복음의 선포와 증거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적용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천국 역사의 믿음의 산 주역들로 저희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장3-11절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했던 편지 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 1장 3절에서 11절 말씀을 살펴보면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했던 빌립보 지역에 세워진 교회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지극히 사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기도의 제목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 교인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에 이르고 말씀을 쫓아 의의 열매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깨닫기 전에 원래는 율법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유대교 전통과 구전을 쫓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이전에 품었던 자신의 유대교에서의 종교적 열성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임을 알고 회개했습니다. 그 후로 부터는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또 그것을 자기 생애의 절대적 목표와 가치로 삼고 살아갔습니다. 곧 진리의 외길을 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옥에 갇히는 것을 고통이나 비극으로 받아 드리거나 하지 않고 오직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충성된 증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 또한 자신의 믿음을 본받기를 간절히 기원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 믿는 자의 참된 영광임을 직시했고 몸소 깨달은 이 신앙을 자신이 세운 처처의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겪어 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의 우리나라 교회들을 바라보면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는 그 모습과 추구하는 바가 무척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만 아니라 바울의 다른 여러 서신서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가 문안 인사 했던 교회의 교인들의 수를 보면 그 수가 몇몇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신자들과 그 당시 사도바울이 처처에 세웠던 교회의 성도들과의 모습은 굉장히 판이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시대에는 로마 제국과 유대교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극심한 반감을 가진 살벌한 적대적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 로마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세상적 권위와 권세를 거머쥔 대제국이었습니다. 피정복 민족들을 통치했던 'Pax Romana' (팍스 로마나)의 강력한 신성제국이었습니다. 유대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수천년 동안 내려왔던 종교적 전통과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로마제국과 유대라고 하는 반그리스도적 세계정황 속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목숨도 내 놓고 믿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진정 부모의 심정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며 성도들을 진리로 잉태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다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라는 일꾼의 땀과 정성으로 빚어진 하나님의 작품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옥중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진리로 인한 고난이 있을수록 육신적 세상적 기쁨이 아닌 그리스도가 주신 심령의 참 평안과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소망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빌어 우리는 바울의 이 마음을 우리도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 매여 있을 때 이것을 슬픔과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복음의 진전으로 봤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의 교권주의자들과 로마의 집권자들이 자기에게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무엇이냐? 라고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바울을 사냥꾼이 전에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한 마리의 괴상한 짐승 한 마리를 잡은 꼴과 같이 여긴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가 누구고 왜 그 자를 바울이 그토록 신봉하는지 의아해 했던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상한 사이비 종교인으로 봤던 것입니다. 어제 피스컵 축구 경기가 열렸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의 문선명이 그 대회 행사에 참관하고 국내외 각계의 인사들과 귀빈들이 모였는데 그 통일교와 문선명이의 위세가 참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안목으로 보면 그는 세계적 지위와 명성, 재력, 등의 영향력을 가질 만한 영적 자질을 가진 자가 못됩니다. 통일교와 그들의 표준 교리서인 원리강론을 분석해 보면 통일교는 수준 이하의 종교입니다. 이렇게 문선명 같은 이도 대단한 재력과 권위를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데 나사렛 이단이라고 핍박받는 진리의 사람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죄인 취급 받고 온갖 고난만 겪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억울하게 자신이 옥중에 붙잡혀 있을 때도 오히려 복음의 진전이 있었다고 기뻐합니다. 그는 로마의 집권자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비록 복음을 수용은 안할 지라도 도리어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봤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품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빠지고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이 빌립보 교회를 관장해야 돠는데 이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사람으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천거하여 세웁니다. 다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젊고 건강해서 팔팔한 사람이 빌립보교회에 일꾼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원했던 것은 주의 교회란 사람의 힘으로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한으로 존속되는 것이고 또 어떠한 삶과 사역의 악조건에서도 성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 라고 하는 깊은 소망의 메시지가 이 일에 담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보여준 삶과 사역에서 나타난 천국의 질서란 곧 하나님은 어떠한 고난의 자리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것 같은 기독교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산 증거가 믿음의 선진들의 삶 속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깨달아야 할 것은 주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국은 누룩과 같이 번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깨달음을 가지고 어떠한 가운데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외형적으로 환경적으로 비천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기도에는 다른 어떤 여타의 기도제목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 9절부터 11절까지를 보면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한 자녀란 하늘의 지식과 총명을 받아 세상의 것들을 내어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의 삶은 처음도 그리스도요, 과정도 그리스도요, 마침표도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말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이전의 자신의 선과 총명과 지혜가 십자가에 못 박혀졌다는 것을 애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전의 사울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지극히 선한 것이 채워진 것을 또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된 하늘의 지식과 총명과 풍성을 빌립보 교인들도 함께 누리고 그 은혜를 같이 체험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그리스도로부터만 발견되어 지게 되는 진실한 십자가의 삶, 이 믿음의 은혜를 받는 것이 참 풍성이며 이 세상에서의 유일무이한 신자의 절대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옥중에서 다른 생각을 안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이 주님 한 분만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승리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의 푯대와 목표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교회 교인들이 너무 쉽게 대량으로 양산이 되어지는데 있습니다. 십자가복음이란 이치상 사람의 육체적 본성과 맞지 않고 좁고 좁은 고난의 진리의 길을 제시하며 신자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별다른 삶을 요구 합니다. 그런데 현 시대의 교회들은 대중들 입맛에 맞게 각색하여 적당선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편한 말로 대중을 추수하기 때문에 교회에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그리고 이런 교인들이 순식간에 대량으로 늘어나는 교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웃지 못 할 사실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데에 또한 보다 큰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많이 생기고 목사가 많아 지는게 좋은 일 아니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쉽게 쉽게 교회도 많이 세워지고 금방 금방 목회자 수도 많아지면 신앙의 수준과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계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쉽게 만들어진 교인들만 수없이 많이 만들어 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오점 입니다.

사도바울이 걸어온 신앙 삶의 역정이라든지 우리가 성경에서 보아 온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는 결코 쉽게 통과하는 삶의 과정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연상해서 우리 시대의 교회들과 대조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무수히 많은 주의 종들과 신자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영적 의식과 각성된 내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이것을 우리가 점검을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바울같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일까? 이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의 모습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사실 초라하고 별 볼일 없습니다. 어떤 화려한 가시적 전도의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바울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힘을 북 돋아 줄려고 합니다.

이 때에 옥 밖에 있는 빌립보교회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졌습니다. 한 부류는 바울과 자신들의 상황이 어려우니까 겉치레로 자신들끼리 티격태격 하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그냥 건성으로 나가서 전도했고 한 부류는 어려울수록 더욱 더 용기를 얻고 그 어려운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깨달으면서 진실 되게 복음을 힘써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바울의 영적인 사고가 더 기가 막힙니다. 겉치레로 예수를 전하든 참되게 예수를 전하든 무슨 방도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자기는 기쁨 삼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진실로 앉으나 서나 그의 자랑과 영광과 기쁨이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다른 것 보지 않고 바울이 옥에 있든 어떤 대단한 업적이 있든 없던 간에 바울을 당신의 영광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기독신자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삶의 힘이자 원천인 것입니다.

오늘날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하는 외적 수단의 매개체를 통해서 대개의 불신자들도 못 가져 본 세상적 출세와 성공의 물리적 요소나 신앙상의 신비적 은사능력 따위 등을 힘이라고 하지만 바울이 ‘신자의 능력’ 이라고 했을 때는 신자가 현실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삶의 외부적 환경과 조건이 다 무너져도 예수로 인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지니는 참 능력이요 자랑이요 영광이요 권세인 것입니다. 이토록 바울의 신앙의 관점은 많은 사람들과 달랐던 것입니다. 누명과 천대와 멸시와 조롱과 핍박과 수많은 오해와 더 나아가서는 죄인 취급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바울은 이것,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은혜관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찬들은 이것을 은혜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가 죽고 힘이 빠지고 절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저주와 벌을 받아서 그런 끔찍한 경우에 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리로 인해 받는 고난이 아닌 누구나에게 닥치는 인생에서의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하나님은 언제 이 나의 갑갑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실까 만을 생각하고 복 받기 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바울은 눈에 보이는 모든 환경과 물리적인 시각으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삼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논하고 가치규정 삼는 믿음의 관점을 가졌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포커스, 그리고 성도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궁극적 내용과 의미는 바울의 이런 마음에 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수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많이 왜곡돼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 설교강단에서 하나님을 기도응답축복자판기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기도응답이 안 오면 하나님과 늘어지게 씨름해야 되고 응답이 올 때까지 빡시게 기도해서 그것을 열심히 잡아 빼내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신앙의 형태에서는 하나님이 뭐냐면 하나의 자판기인 겁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세상의 보물창고 같은 자판기에다가 세상적 육신적 욕심의 주화를 넣고 교인이 원하는 것을 누르면 그것이 편리하게 나온다는 이치입니다. 그것이 세상성공이든 자기자존심이 살려지는 자기자랑의 일이든 버튼을 누르는 겁니다. 그러다가 잘 안 나오면 신경질 나니까 주먹과 발로 나오라고 뻥뻥 차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복주의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간청과 내 요구가 있다 할지라도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인고의 과정이 있어야 참된 신앙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기독교의 정신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거진 다 어긋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감옥에다 집어넣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이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고 배워라, 기쁨 삼아라, 라고 하시기 위함 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은혜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분별하거나 알 수 있는 관점에서의 은혜가 아닙니다. 이 말은 그만큼 인간이 단단한 죄덩어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참되고 진정한 이 은혜관을 수용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하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으로 우리가 풍성히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을 보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했노니” 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묵시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세속적인 교회의 교인들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 나오는 여러 심령 땅을 보면서 마음에 손을 얹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거기서 길가는 천국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심령을 주님이 말씀 한 것이고 돌밭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잠시 견디다가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의 마음을 말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 떨기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심령 땅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란 영적인 무지가 없고 환난과 박해에 아랑곳 하지 않으며 세상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 자신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 일체의 비결이라는 것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 자신은 어떠한 환경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즉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풍부와 배부름뿐만 아니라 배고픔과 궁핍에도 자족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십자가의 삶을 통해 가질 수 있었고 순수한 신앙 삶의 깊이를 배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 삶의 고난은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의 모략을 또한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든 배우는 사람은 비결을 배우는 겁니다. 가령 어떤 주부가 김치를 잘 담그면 김치 잘 못 담그는 다른 주부가 맛있게 김치 담그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 보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에도 비결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이 바울과 같은 이 신앙 삶의 비결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녹아진 인생이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매인바 된 것이 복음의 진전이요 이것이 은혜요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 기독교를 아주 말살 하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이런 전력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듯이 이 사도는 늘 자기를 가리켜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습니까? 또 어떻게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비춰지기 원했습니까? 죄인의 괴수로 비춰지길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 사실 자기가 죄인의 괴수니까 억울해 할 필요도 없이 옥살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스스로가 평소에 자신을 생각하기에 죽어 마땅한 자로 생각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꼭 법적으로 구속되고 어떤 사회법에 걸려야 감옥에 가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어떤 범법 행위가 없어 교도소 안 가면 자기는 양심 있고 도덕적인 인간 이어서 별반 잘못 없는 쓸만하고 괜찮은 인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되냐면 사도바울과 같이 나는 영적으로 흉악한 강도요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자기에 관한 정체성의 이해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신자가 십자가복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그 처지가 억울하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바울은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자신은 이미 훨씬 이전에 감옥에 수 천번 이라도 들어왔어야 될 마땅한 죄인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었을 것입니다. 그런 죄인의 괴수인 바울이 세상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돈이 없다고 괴로워하겠습니까? 건강이 없다고 욕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까? 또 남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실질적으로 그는 자신이 진정 죄인임을 인정한 겁니다.

다만 그는 죄인인 자신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대접해 주신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사랑, 그 풍성한 은혜가 버거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불평과 불만이란 그에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알기 이전에 다들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가 괴수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당신의 찬송 삼아 주십니다.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요 은혜요 영광입니다. 신자의 은혜관을 우리는 이렇게 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라고 하는 것도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절대 영원 안에 담긴 인생만이 이 신앙을 이해하고 복음의 능력에 맞게 뜻을 세상에서 펼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말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공허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일시적이고 다 헛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진 격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것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참된 인생의 가치를 자신 안에 채우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나도 한몫 잡겠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비참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특히 대한민국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진정한 풍부의 하나님으로 받들지 않습니다. 현 우리나라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풍부한 하나님입니다. 이들에게 또 천국은 마치 세상의 보물 창고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 보물창고, 풍성한 자원을 믿고 확신하고 긍정만 하면 언제든지 갖다가 다 끌어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개념 없는 잘못된 복음주의가 오늘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적 거짓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외관상으로는 풍부한 하나님일지는 몰라도 바울의 시각과 오늘 이 성경 본문이 말씀하는 시각에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비천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적 우상신이 아닙니다. 천국의 하나님입니다. 천국의 하나님의 모습은 초림시 그 외형적 모습이 보잘 것 없고 생이 초라하고 비참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보여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주님 안에만 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과 의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주님을 붙잡고 이 주님을 자신 안에 채워서 이 주님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들을 신자는 만들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그겁니다. 하나님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시는 겁니다. 거짓된 비복음적 신자, 세상과 짝하는 신자, 그리고 진리와 비진리를 혼동하는 신자를 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옳게 이해하고 이 한 분 만을 자신의 기쁨삼고 그것만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진실한 믿음의 성도를 하나님은 이 시대에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기서 의의 열매라는 것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깨달아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존귀케 되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묻어 나오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세상과는 이질적인 구별된 성도로서의 거룩함과 신실함이 여러분들의 삶과 인격 속에 늘 깃들어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성도가 되도록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고 찬송 돌리는 신실한 삶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거룩과 의와 완전하신 사랑과 그 구속하신 생명으로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를 빌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전에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자신이 신앙생활 잘 한 것 같았고 부족한 것이 없었고 또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고 보니 자기처럼 크나큰 죄인의 괴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서 바울과 같이 죄인의 괴수임을 시인하고 살아가게 하시고 그러한 마음과 심정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만이 빛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속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에게 구속되는 참 절대 자유에 놓인 인생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진리는 세상의 모든 악과 부정한 것의 결박을 풀고 깨트리는 권세 인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 생명의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좁고 협착한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면서 참된 승리와 영광의 길로 연이어 달려가는 우리 신앙의 달음박질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을 깊이 체험하고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더욱 더 계속 진입하여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차고도 넘쳐나는 풍성한 은혜가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신앙의 의의 열매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신자의 진정한 초월관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세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9-14절

 

 

 

오늘 성경 본문에서 두 가지 영적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윤리, 도덕에 흠이 없고 아주 철저하고 완벽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당시 전형적인 죄인에 속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당시 창기와 함께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충격적이고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기도 열심히 하고 죄와 상관없어 보이고 종교적인 율례를 잘 엄수하는 바리새인 보다 자기의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 칭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21장 31절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면 이런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죄의 은혜와 구원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과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영적인 구조와 상태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 하면 구약 시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성문법으로써의 율법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7절에서 8장 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인간 마음에 본성적으로 새겨진 도덕적 양심, 곧 인간 마음 중앙에 내재되어 있는 악, 마음의 지체법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본래 선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마음속에 악이라는 다른 한 법이 같이 있어 언제나 선을 행하려고 하면 항상 이 죄의 법이 선을 삼켜버리기 때문에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한다고 말하면서 이 한 다른 법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자신을 사로잡아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자신이 아니요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상 천하에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단단한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있는 곤고한 자신을 건져내고 해방할 자는 오직 이 율법의 사망 권세를 깨시고 인류에게 산 길을 열어 주신 생명의 법의 주관자요 권세자인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말처럼 사람 마음에는 선과 악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설명한 것처럼 선을 평생동안 100% 지키고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의 단단한 굴레를 벗어 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구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과 공로로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고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착각하고 600가지가 넘는 수많은 율법의 세칙들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구약 율법의 역사란 인간이 99가지를 지켜도 한 가지를 어기면 율법을 다 어기는 것이 되므로 그에 대한 율법의 보응과 형벌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먼저 타락한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철저히 선을 행할 수 없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신 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의의 표준과 생명의 법을 세워 죄로부터 죄된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은혜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이르게 하시려는 십자가의 도의 예정적 섭리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사명적 기능과 용도요, 율법의 한계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령 사람이 옷을 사람들 많은 곳에서 벗고 있으면 수치를 느껴 옷을 절대적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처럼, 몇 일 동안 물을 못 마신 사람이 시원한 생수를 원하고 이 후에 시원한 생수를 마셨을 때 그 시원함의 감격과 물맛을 느끼는 것처럼 또는 3기말 암 환자가 유명한 암 전문의가 있다는 소식을 누구로부터 들었을 때 생의 애착으로 인하여 그 명의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알게 하고 오직 예수 십자가로만 구원 받는다는 절대 진리를 깨닫게 해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길잡이 역할과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노력과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인이 되고 완전한 선에 도달 할 수 있게 되며 신의 거룩한 성품에 다다를 수 있는 줄 크게 착각한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신앙행태란 마치 인간의 영적 실존 자체가 죄인 그 자체인데, 시궁창에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이, 혹은 비린내 나는 생선을 예쁜 선물 포장지로 겉을 포장한 것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7절, 23장 26절에서 28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외형적으로 그렇게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 정죄 하면서 “회칠한 무덤들” 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무덤인데 무덤 겉에다 하얀 회 가루를 뿌린다고 해서 무덤 안에 썩은 시체나 뼈가 사라지거나 무덤 안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무덤은 무덤일 뿐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력으로 달라지거나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대적 진리, 기타 여러 종교, 형이상학적 가치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인간은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TV가 전원에 연결되지 않아도 TV가 켜진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불교의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은 살아 생전에 난이도가 높은 고행을 수행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8년 동안이나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틀고 등 한번 방 바닥에 대지 않으면서 용맹정진의 수도를 한다거나, 10년 동안 생식을 하면서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묵언수행을 감행 했습니다. 성철은 인간의 죄성과 실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깊히 깨달은 불교계의 공력 있는 대선승 이었습니다. 그의 인격과 정신세계의 고매함은 분명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도들은 인간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개발하면 해탈하고 참 나를 발견하여 성불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인간에게는 참이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참은 오직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한 분에게만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보편적 궁극적 진리를 향한 인간의 자기 의지의 삶 내지 종교적 행위는 다만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나름대로 상대적 진리를 동경하는 인간의 삶과 종교적 행위의 시도는 실상 사람의 인격적 형태만 어느 정도 달라지게 만드는 것뿐 이지 사람의 본래적 죄된 성분을 달라지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지금 내 책상 위에 구겨진 종이가 있는데 이 종이를 깨끗이 펴고 싶어서 내 손의 힘, 즉 물리력을 행사하여 종이를 폈다고 해도 종이는 종이로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기독교의 절대 진리는 이러한 물리적 미온적 형태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성분적 변화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종이가 연필이 된다고 하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근본적 변화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와 힘이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참 하나님 이시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성적으로 어두움과 죄와 사망에 처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면 사람이 본유적 관념으로 아는 추상적 영원 생명이 아닌 진정한 영원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몰라서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생명의 왕이신 예수를 이해하지 못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오늘날의 예수를 믿지 않는 수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예수 이름으로 인해 부활에 이르게 되는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생각으로 종이가 순식간에 연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의 후사,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신분과 존재가 바뀌는 근본적 변화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에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달걀을 나눠 줍니다. 달걀은 어미의 온기를 받아 일정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껍질을 깨고 액체에서 병아리가 됩니다. 즉 달걀의 신분과 성분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명에 관한 일은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신비에 관한 일입니다. 물은 시냇물에서 강물로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야 썩질 않습니다. 임산부 뱃속의 아기도 때가 차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나오지 않으면 죽습니다. 만물의 곡식도 씨앗의 껍질을 벗고 열매를 맺어야지 열매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흐르는 원리요 필연적인 법칙입니다.

고로 인간은 길이요 진리요 진정한 영원절대 생명 되신 완전한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믿어야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은 가도 되고 안가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물건은 만드는 사람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창조 하셨을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의의 천국으로 옮기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이나 방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야 됩니다. 세리는 바리새인 보다 오히려 인간의 실질적인 참 모습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는 용이한 죄된 환경과 삶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의, 인간의 자존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입니다.

인간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요, 교만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자랑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신이 유한자요, 피조자임을 망각하고 자기 스스로도 속고 남도 속인 채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가려고 하는 헛된 초월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초월적 의식을 신불신간 많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상의 초월, 신자가 지녀야 할 참된 초월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늘에서 무조건적으로 이 악하고 어두운 세상으로 내려와 만백성을 사랑하신 그의 죽어주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현대의 기독인들 중에는 이적과 표적, 보이는 능력적 은사를 좋아합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큰 소리로 기도해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능력과 권세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시면서 한 여름에 구더기가 들끓는 옛날 시골 재래식 변소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예수의 자기 비하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심, 받은바 계시가 지극히 크나 된 줄로 여기지 않고 묵묵히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삶, 틀린 말 한번 하지 않은 자기에게 돌을 들어 죽이려 하는 원수들을 향해 하나님의 자비하신 용서를 구했던 미움과 증오로 점철된 세상 원리와 질서를 거스린 스데반의 죽음에서 진정한 초월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수많은 이단의 교주들, 카톨릭 교회의 교황 무오설, 하늘을 찌를 듯 하고 거룩해 보이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성당과 오늘의 사치스런 현대교회의 예배당, 타종교인들의 자기완성을 위한 구도의 열성, 비 복음적 기독교도들의 외형적으로만 경건해 보이는 철저한 율법적 신앙 등 이것들이 잘못된 초월자들과 초월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6.25때 자기의 두 아들을 학살한 인민군을 자기의 양아들로 삼은 손 양원 목사님, 일본의 신들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순교하신 주 기철 목사님, 보이는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절대사랑과 절대생명이 담겨있는 십자가 신학을 표방했던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에게서 진정한 초월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인은 사단 앞에서 마광(磨光) 된 칼을 든 능력 있는 영적 거성을 꿈꾸기보다 먼저는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허물을 용서하는 복음의 능력과 넘어섬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영광은 지극히 작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 있고 세상의 큰 영광에 둘려 쌓여 가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굿간에서 출발해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마쳐집니다. 즉 초라와 비참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 하나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영광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초월성과 구속의 완성이 있습니다.

맑고 밝은 새 아침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깊고 깊은 어둠을 통해서야 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신자가 잘 믿어 보려고 온갖 발버둥을 쳐보다가 도저히 그 신앙적 꿈을 이룰 수 없다는 포기와 절망, 그 어두움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자기극기의 초월적 신앙이 세리가 자기를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모습보다 어려운 것 같지만 실제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된 영적 실상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솔직히 인정하기까지 가는 것이 백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가 선을 추구하고 진리를 소유해서 스스로 거룩한 자가 되고 싶은 강한 자기 집착과 자기 ‘의’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 질 생각 안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 마음의 본성 뿌리는 여전히 죄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큰 소리 칠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진정한 겸손함으로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이웃의 발을 씻기려고 하는 성령의 능력의 확신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의 자기 넘음, 즉 십자가 앞에서 낮아지는 인격적 초월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니는 역으로의 초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낮아지거나 일부러 겸손한 것이 아닌 예수 안에서 진실하게 진리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작은 자’가 되는 거꾸로의 참 신앙적 성품적 초월인 것입니다.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헛된 초월적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 보려고 자신을 포장하여 외식적으로 경건을 추구하기도 하고 신비적인 능력에 마음이 가서 체험하고 본 것을 헛되이 과장하는 잘못된 영적 습성도 지니고 있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고함과 위선과 욕심들이 저희들 생각에 자리 잡지 않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된 복음적 신앙인들로서 진실 되게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귀한 일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저희들이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크게 되고 인정받고 하는 것이 참 신앙의 초점이 아님을 아오니 오직 저희로 말미암아 ‘주의 권세와 영광과 의’만이 증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성도의 형통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2장20절

 

 

 

 

인간의 본래 영적 본성과 성향은 육신적이며 마귀적이며 세상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불신자들과 계시의 정신을 소유해서 십자가의 도를 온전하게 체험하지 못한 신자들을 가리켜서 율법 아래 있다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가르치면서 율법에 관해서는 신령하게 “육을 입은 모든 사람은 인간의 내면 마음구조와 기능이 그렇게 되어있다”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선악의 지체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 마음 안에 양심이 곧 율법 이라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양심, 생각, 이성은 율법의 속성과 기능으로 지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이성적 사고를 지닌 인간들은 참 하나님 중심의 계시 의존적 신앙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생각과 자기 의’ 라고 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하여 보이는 상대적 육신세상과 연관된 것으로만 만족삼고 진리 삼으려고 하는 의지와 경향을 보이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의 인간 본성의 마음과 세상에서의 삶을 율법적이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의 본래적 영의 구조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목표와 지향점은 “육체의 낙과 세상나라와 세상의 의” 이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과 그 의”가 아닙니다. 곧 율법적 사고 아래 갇혀 있는 육의 사람들은 세상 영광과 자기만족과 자기 의와 자기 명예, 자기 자존감만을 위해서만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자기 이름이 사람들한테 알려져 이 세상에서 힘을 가져 남을 정복하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인생을 추구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의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포로 되어 종노릇하는 육에 속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이 없으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이들의 마음상태가 영적 차원으로는 마귀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 되어야 할 오늘날의 교회들이 복의 기준과 관념을 너무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복과 전혀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이 원인이 어떻게 교회에서 흘러 나왔느냐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보혜사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의의 말씀으로 거듭나 있지 아니하면 육신적 사고를 갖고 자기 식으로 밖에는 성경을 해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원래 제시하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말씀과, 자기의 고정관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은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신자와 교회와 교계가 타락하고 세속화 되어지는 것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냐면 말씀의 타락이 있습니다. 이 말씀교리의 타락과 변질은 진리의 영 이신 제 3위 되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인간이 차단하고 자기 이성과 선입주견으로 성경을 보고 목회자들이 목회활동도 하고 평신도들이 신앙생활도 하기 때문에 교회가 복음의 순수한 길로 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따져서 생각해 보면 모든 기독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말씀의 올바른 이해 만으로만 참된 변화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인위적인 인간들의 수단과 온갖 방법들을 동원한 잘못된 세상성공신화주의식 부흥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신자들의 내면의 영적 부흥이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신자의 영적인 참된 성장과 성숙도, 교회의 참다운 부흥도, 신자들에게 말씀이 옳게 뿌리 박히도록 말씀이 말씀답게 증거 선포된 그 자리에서 영적인 새순이 올라와서, 가지가 나고 열매 맺어 완성 되어지는 일들이 이루어져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인본주의 교회활동과 신앙이 됩니다. 신앙의 모양과 내용에는 인본주의가 있고 신본주의가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암만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고 무작정 막연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또는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적 만족이요 기쁨이라고 해도 그건 인간의 만족과 기쁨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내가 만족이 없고 내가 기쁨이 없고 내가 현실적인 유익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과 유익으로 나의 만족과 기쁨과 유익을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벌려놓는 종교적 인본주의의 화려한 잔치를 기뻐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 기독교계는 하나님이 나타내시고 밝히시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과는 거리가 참 멀다는 것을 우리는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중요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님과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어떤 신앙적 의식과 사상과 영적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가 진실로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신자들 중에서도 육적 신자가 있고 영적 신자가 있습니다. 즉 가라지 신자가 있고 알곡신자가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염소가 있고 양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예배당안에 교인들의 수가 메어져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가라지와 염소같은 신자들이 대부분이면 하나님은 기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육적인 사고로 꽉 차 있어서 알곡과 양을 만들어 내는 목회를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천국의 복을 소개하여 신자들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지 못하고 있는 참담한 실정입니다. 신자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에 대해 죽는 ‘십자가의 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혀 영생에 보탬이 안되는 단순한 신자의 건강과 세상범사의 형통만을 논하고 눈 앞에 놓여 있는 교회 외형적 성장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늘날의 신자들에게서는 참된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급한 영적의식과 아름다운 신앙의 자태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 시대의 교회 안에서는 위대한 복음만이 가지는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비롯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령한 축복과 신자의 진정한 형통 등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의 교회신자들의 영적 수준 이란 것은 절방과 무당들을 찾아 다니면서 기복심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실질적으로 비교해 보면 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교회의 이름들 중에는 ‘번성교회’ 라든지, ‘축복교회’ 라든지, ‘복된 교회’ 라든지, ‘비전교회’ 라든지, ‘꿈꾸는 교회’ 라든지, ‘월드교회’ 라든지 이런 류의 교회이름들이 많은데 이 이름이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 이름들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런 교회이름들을 즐겨 사용하는 지에 무척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과연 무엇의 번성이냐? 그리고 어떤 식의 축복이냐? 또 어떤 식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냐? 그리고 그 꿈꾸는 꿈이 도대체 뭐냐? 수천 수만교회 세우고, 아프리카까지 가서 전도하고, 천편일률적으로 수평적 차원에서의 선교만 해서 수만 채우는 것이, 그런 전 세계적 교세 확장만이 축복이고 비전이라는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판부터 정말 상당한 이 세상적 무력과 힘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한꺼번에 거덜냈지 뭣하러 목수의 아들로 와서 당시 초라한 어부 몇 명이나 구해다가 제자 삼고 쓸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 “천국과 천국의 영광은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 안에 들어있다. 나의 길은 좁은 길이다. 나의 길을 찾는 사람도 없고 많은 사람들은 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이런식으로 말씀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식의 예수상이 아니라 성경에 적혀있는 어느 누구나 꺼려 할 수 밖에 없고 도저히 따라 갔다가는 인생 끝장 날 것 같은 참 예수를 따라가야 세상에 속한 복이 아닌 인간의 눈에 잘 잡히지 않는 천국의 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허락 하시려는 복은 사람이 원래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인간적 복 개념이 아닙니다. 십자가 계시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복으로서 사람이 누구라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이 세상과 연결된 본래의 육체의 옛 생각과 옛 자아가 십자가 선상에서, 즉 말씀의 십자가 안에서 죽어지고 영혼이 거듭나지지 아니하면 천국의 복도 전혀 모르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게 무엇이냐면 무엇이든지 어떤 방면으로든지 신앙세계를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것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교회신자들은 사실 그냥 다른 것을 믿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문자와 기호적 이름만 알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절대적 이해에 있어선 커다란 실패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를 보이는 육체대로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본성적인 이성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를 천국과 연결하여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다가 대입하여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참 예수가 아닌 보이는 육체와 세상과 관련된 거짓된 예수를 믿게 되면 오늘날 현대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상대주의 신관념과 진리인식개념의 논조와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기독교의 수준이 딱 거기에 걸려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오늘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왜 기독교만 진리냐? 다른 종교에는 진리가 없느냐? 모든 산의 오르막 길은 다르지만 산 정상은 똑같다. 석가 추종해도 되고 공자 따라도 되고, 도를 따라도 다 똑같다, 각기 종교적 틀의 패러다임만 다른 것이지 알고 보면 다 똑같다. 여러 강줄기도 모여서 바다로 합쳐지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진보주의 교단의 일부 종교다원론의 색채를 지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예수 아닌 다른 식으로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중심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보편적 신 중심의 신앙을 그들 머리와 가슴속에 지니고 예수를 해체 시켜 버립니다. 문제는 이들은 자신들이 본 신이 참 하나님이라고 크게 착각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참 하나님인체 하는 육체 인간의 눈에 쉽게 보여지는 보이는 이 세상의 세상신 하나님인체 하는 사단에 불과 합니다. 참 하나님은 오직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 계십니다. 곧 참 하나님이 이 아들 안에 아들이 이 참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나 다른 곳을 통해서는 진짜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습니다. 이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참 하나님의 그림자격인 허상에 불과한 육체인간들의 마음과 눈을 속이는 자, 세상임금, 세상전권자인 사단을 보고 생명의 하나님 내지는 참 진리 등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자, 십자가 계시만이 절대 진리 인줄을 모르고 인간이성으로 알 수 있는 상대적 수준의 진리인식으로 신에게 접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룩하신 참 하나님에게 감히 예수 그리스도 없이 직접 접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피조자인 인간에게 맞춰 줄 수는 있어도 한낱 마른 막대기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 따위가 크신 하나님을 자신 머리 안에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본체 형상되신 이 분이 비천한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입으시고 직접 내려와 주셔서 허물 많은 인간들을 만나 주시는 것을 허락해 주신 것으로 만이 하나님을 알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면 다 같은 진리가 아니고 신이면 다 같은 신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도 상대적 수평적 차원의 진리가 있고 절대적 수직적 차원의 진리가 있습니다. 신도 참신이 있고 거짓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 이 세상신은 천국의 하나님인양 자신을 가장하고 인간 머리에서 나오는 이성의 상대적 교훈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절대적 생명의 교훈과 구분할 수 없게 육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신은 인간들의 용어와 개념을 혼란시켜 버립니다.

레닌이 공산주의화할 때 공산주의 혁명전략 가운데 말을 혼란케 하라는 ‘용어혼란전술’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민주와 자유’라는 말을 세상에 많이 퍼트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민주와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민주 자유’의 개념과는 굉장히 다른 겁니다. 그건 폭력을 수반해서 목표를 달성하자는 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폭력을 지향하고 피를 부른 뒤 유혈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자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런 민주와 자유는 허상에 불과 합니다. 절대로 이들이 추구하는 민주와 자유는 세계에 정착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끌어당겨서 자기들이 설정한 관념에 맞추어 복을 논하고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개념을 신자들이 바꿔놓으면 그것은 인간들이 세운 기독교인 것이지 하나님이 세운 기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분명하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 가지 않으면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바른 정로(正路)라는 것은 우리 눈에서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의 맹목적인 현실 속 형통과 육신적인 행복만을 기뻐하시겠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들 자신에게 던져 봐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대개의 교회들은 하나님을 논할 때 좋으신 하나님과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동네 가게에서 파는 몸에 안 좋은 어떤 불량식품과 사탕 등을 보고 땡깡을 피우면서 그것을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르면 마땅히 부모는 말로 얘기를 해서 설득하고 그것은 안 된다. 네 요구조건을 다 들어줄 수 없다고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또 아이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 교정하고 교육하는 차원에서 매를 드는 것은 아이를 위한 당연한 처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무조건 사달라고 하는 대로 다 사주면 애 입장에서 보기에 그 부모가 참 좋은 부모로 비춰 질 순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그게 어떻게 좋은 부모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진짜 좋으신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믿음의 자녀들이 힘이 들어도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게끔 만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참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대다수의 교인들은 보이는 육신적 세상중심의 신앙 관념을 지니고 자신들의 현실적 타개책을 하나님께 마치 정당한 신앙목표로 내 건 다음에 그걸 해결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들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력을 다해 통성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귀를 막지 말고 자신들의 문제를 늘 들어야만 된다는 아집과 하나님을 향한 집착스런 강요가 이런 이들의 기도행위 밑바탕에 심리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도 어떤 하나님이냐면 자기 육체적 소원의 조건을 늘 기꺼이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며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오히려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에서 나와서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식의 사람의 도구 내지는 노예 정도로 전락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갖다가 말로는 복종하고 순종한다고 하는 거지 이용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니까 자신들한테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고 예수 믿으면 다 만사가 형통이고 모든 문제가 술술 잘 풀어지고 무조건 몸이 건강하게 된다고 철석같이 믿으니까 그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치료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 존재되심에 의미 부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하나님을 믿자고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면 그건 바른 전도가 아닌 겁니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보이는 것에서 육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수준에서만 관련해서 모든 영적 관념과 성경적 개념을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첫 판부터 신앙세계에서 신령한 부분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바른 진리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로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과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우리와는 절대적으로 타자입니다. 전적 타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하나님은 기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천국은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이 비슷하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이 천국의 모형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비슷하니까 그 모형적 세상을 천국으로 혼동하는 것이 현 교계의 영적 실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 많은 교회들의 추구하는 바 지향점과 주의 종들의 신학을 분석해보면 세상과 천국에 대한 명확한 분별점이 없습니다. 곧 이들의 세상관과 천국관은 세상이 천국같고 천국이 세상 같습니다.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들이 세상과 천국의 유사성과 이질성에 대한 뚜렷한 판별능력과 신학적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는 겁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권의 책,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또 예를 들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와 단어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다 같은 사람이라도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다른 두 존재, 남자와 여자를 합해서 사람이라고 지칭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한 날’ 이라는 ‘날’은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한 날’의 낮과 밤은 다른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이치와 경륜에 ‘같음과 다름’,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구분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같은 카테고리로 놓고 보면 거기에서 굉장한 오해와 혼동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뭐냐면 말씀이라는 것을 들어서 개념 정리를 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선입관념을 지워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바른 개념을 자신의 마음속에 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지므로 인해서 신자는 속사람이 달라지고 탈바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이라는 것도 오늘날 교회들이 이야기기하기 좋아하는 식으로 세상 명예와 부와 성공과 건강을 소유해 나가는 하나의 능력적 재료 차원에서 알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기준은 신자의 보다 나은 생활형편과 처지와 환경 그리고 상황으로 연결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소위 육신에 속한 율법적 신자들은 신앙을 다 이런 자신의 향상된 형편과 처지, 환경과 상황과 생활로 연결해서만 생각을 합니다.

예수 잘 믿으면 여호수아서 1장 7절과 열왕기상 2장 3절에 나타나 있는 “신자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크게 확신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큰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가 신앙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 외형적, 물리적, 환경적 상황과 형편이 좋아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이 진리가 살아 역사하는 천국으로 변화되어서 무엇을 하든지 어디 있든지 주의 신실한 백성으로 살아나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주는 의와 화평과 평강으로 세상의 근심과 염려나 두려움 등으로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고 싶은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곧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와있는 복은 마음에 관련되고 영혼에 관련된 복이지 육신의 삶의 현실적인 타개책을 해결해주는 면으로서의 세상복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산상수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주리고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의’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의 말씀 때문에 박해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듣는 자가 복이 있고 또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상이 큼”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디 지금 우리 현실 교계에서 대부분 말하는 세상의 현실적이고 육체와 상관된 복을 이 산상수훈에서 논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들의 현세의 만족을 위해 그것들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없는 세상에 속한 복과는 전혀 다른 거꾸로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속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은 세상 사람들과 비진리의 복음에 거한 교인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복이며 이해할 수도 없는 복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본래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복은 복도 아닙니다. 다만 오히려 불이익이며 큰 수치며 억울함이며 죽는 길이며 처절한 길이며 아픈 길일 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복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은 받은자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참된 신자가 받을 이 복은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 있으며 세상적 수준에서 누구라도 쉽게 상상이 되는 그런 복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신자의 맡겨진 구원섭리 아래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외부적 환경과 조건과 상관 없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구원하에 놓인 삶이 곧 신자의 형통과 복 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진정한 신앙의 형통적 삶을 산 사람이 바울 입니다. 바울의 그 현실적 삶 가운데서 어떤 세상적 명예와 영광과 육신적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단의 심장부에 있던 로마로 압송되어 갔던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형통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억울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가 바울은 도리어 욕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자랑할 만한 일이며 기뻐할만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쪽으로의 형통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이 믿는 자의 영혼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겁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그런 바울을 지켜줬기 때문에 세상에 아무런 증거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환경에서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해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놓치면 천국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적 수준의 종교인 밖에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오늘날 교계의 형편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고난과 박해가 있어도 진리가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성도에게 가난과 누명과 병이 있고 억울함이 있을지라도 진리가 함께 해서 심령이 자유로우면 그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만을 의지하여 하늘과 이 세계에 막혔던 담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백날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 없는 사람들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 드시기를 어떤 이들이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종 노릇 하고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갖가지 권세와 능력을 다 행하였나이다.” 해도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답니까?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입니다. 이 예수님의 답변에 이들은 또 애타게 말합니다. ”아니 주님 내가 주의 일을 했는데 왜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래도 예수는 ”나는 너를 몰라.“ 즉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람이 생각하는 예수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라고 하면 예컨대 뭐 부처상에게 절하면, 그런 행위만이 우상숭배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타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믿고 섬기면서도 우상숭배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신자가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잘못 깨달음으로서 헛된 길을 갔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욕심 많고 무지한 죄인들인 인간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화 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성경을 읽고 공산주의 식으로 생각하면 성경말씀은 공산주의 이론이 됩니다. 불교 스님이 전도서를 보며 불교식으로 염불을 외우고 목탁 두드리면서 “헛되고 헛되도다” 하면 불교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슬람교도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자기 식으로 보면 이슬람 경전이 되는 겁니다. 무신론자들도 자신들이 필요한 소스를 얼마든지 끌어다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겁니다.

저도 옛날에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때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서 제 식으로 사랑을 생각한 겁니다. 그 나이에 맞게 내가 알고, 하고 싶은 사랑의 눈으로 성경말씀을 보니까 너무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 당시의 사랑관은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아가페의 신적 사랑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똑같은 Y자를 보면서 다 다른 생각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버스운전사가 Y자를 보면 그 기사의 머릿속에 도로교통 표지판이 떠오르게 되고, 아이들이 보면 새총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각기 연상되고 자기 속에 받아드리는 것이 모두 틀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식의 예수냐?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과 형통’이 어떠한 식의 ‘복과 형통’ 이냐? 를 모르면 거기에서 굉장한 신앙상의 오해와 착각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참된 신앙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진리의 성령을 통해 옳게 해석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과 현세의 육신의 삶에 있어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참된 복음 안에 거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공중을 잡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 세속적 경쟁에서 빚어지는 성공, 출세, 건강 등을 갖지 못했을 때에는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해서 근심하게 하고 겁나게 합니다.

마귀는 곧 세상의 것으로 이렇게 세상에 메어있는 육의 사람들을 관장하고 꼼짝 못하도록 휘둘러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이 세상적인 보이는 것과 만족과 육신에 관계된 것을 완전히 붙잡지 못하면 이들 마음속에서 두려움의 영으로 역사해 초조하게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목표를 취하게끔 하고 또 그런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자살도 하게끔 합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육신적 세상적 질서로 참된 복음의 백성들 외에 신불신간 많은 육적인 사람들을 자기 백성 삼고 죄와 사망의 원리와 권세로 통치하고 이 어두움에 포로가 되도록 가둬 놓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도의 형통이라는 것은 성도가 참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와 의가 드러나는 삶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구약적 형통은 신약적 차원의 형통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약적인 것은 대개 보이는 차원에서 세상 능력 일변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출세와 건강과 장수와 번영, 형통 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적 수준에서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적인 면에서 떡반죽 그릇에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신자 영혼의 생명양식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데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떡을 받을만한 떡반죽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보배로운 산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진리 되시는 분을 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복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해석과 의미는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계의 영적 수준은 어떠하냐면 전반적으로 구약적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부분이 실로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이면적인 길을 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할례를 논했을 때도 표면적인 할례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면적인 할례, 즉 보이는 육체가 아닌 마음에 받는 할례를 이야기 했습니다. 또 그는 당시 유대인에 관해서도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을 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도 보이는 신비적 기적적 외적 은사 역사가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진리의 말씀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와 전도, 목회의 철학, 모든 사역의 방면에 있어서도 형식과 외형, 눈에 보이는 조직과 행정, 화려한 프로그램, 비까번쩍한 건물 예배당 세우기 등의 보이는 업적과 성과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세속으로 기울어진 오늘의 수많은 교회들의 잘못된 신앙의 행로를 따라 가서는 아니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해가 되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적 차원의 형통이라는 것은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에 기인합니다. 율법적으로 종교행위를 적극적으로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자연세계 내재원리적 인과응보식 형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기복주의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구약적 수준의 율법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은 무엇이든 보이는 것에 연연하기 떄문에 환경에 어려움이 오면 진정 다 쓰러집니다. 그래서 아까 산상수훈의 말씀에서처럼 진리로 인해 박해 받을만한 때가 오거나 어려운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순교의 길로 못갑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했을 때도 마음 땅이 옥토에 해당하는 신자만이 말씀에 근거해서 열매를 맺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심령을 지닌 사람들은 천국말씀을 받고 그것을 삶에서 승화시켜 나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진리로 인한 환난과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오면 이들은 기운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옥토 심령을 소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삼십배, 육십배 완전한 천국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에서 율법 역사의 사역자들과 복음신앙의 사역자들, 율법적 신앙인들과 천국역사의 복음적 신앙인들은 다르다는 것도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 신앙과 복음신앙의 분별력과 차이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복음 신앙의 사역자들과 천국의 주인공들은 어느 시대든 그 수가 적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희들이 추구하는 것은 작금의 다수의 교계의 일반적 시대정신과 성격과 내용이 다르고 본질과 방향이 다르며 전혀 이질적이고 또 그만큼 어려운 길이며 좁은 길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길에는 밤낮 기뻐할 수 밖에 없는 것, 진정한 형통이 있습니다. 이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그 형통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 길은 남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 채지 못하는 받은 자 외에는 알 수 없는 길입니다.

율법의 사람들은 복음 안에 거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핍박하고 거부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를 사도바울이 교회적 차원으로 연결해서 알레고리컬하게 비유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종인 하갈과 이스마엘의 계열이 주인인 사라와 이삭계열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히려 주인 행세하는 종들을 언약의 주인공들이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두 부류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신앙과 복음신앙은 다릅니다. 달리 표현하면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도 ‘십자가의 도’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가 서로 미련하게 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당시와 초대교회 형성시에 유대교인들도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거짓된 것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암만 신을 믿었어도 십자가 도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참된 순수 하나님의 내적형상, 그 존재되심에 근접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도 십자가에 걸려있는 천국, 십자가에 달려계신 하나님이 아니면 다 참 천국,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 부분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기로 작정한 자를 말합니다. 또 순수한 신앙이란 천국의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과 영생에 관해서 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기업으로만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영적이고 내세적이어야 합니다. 탈현세적으로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나 영원불변의 절대적 천국의 원리와 질서를 가지고 세상에서 구별되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더럽고 추한 세상을 향해 거룩한 테러를 하며 역으로 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란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역류의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형통이라는 것은 단순한 현실적 세상적 육신적 형통이 아닌 영혼의 부요와 강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 내면의 변화를 얘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안에 충만히 채우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키는 하나님의 형통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형통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진리로 인해 신분과 영적 수준이 존귀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늘어난다고, 자기에게 좋은 차가 있다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존귀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목사가 좋은 사택에 산다고 해서 존귀한 것이 아니요, 비록 굶고 헐벗어도 마음에 진리의 보화를 담고 살면 그 목사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며 영적으로 형통한 자입니다.

그런즉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신분을 지니게 되고 자신이 겪게 되는 영혼 속사람의 수준적 고귀한 형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서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하지 아니하는 신자,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고난이 와도 의미 있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줄 아는 삶, 순전히 그 자체로서만 거기에 참된 형통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위해 보냄 받아 사람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이지, 자신의 육신적 일반적 삶을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시고 진정한 형통의 길로 가셔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형통일지라도 하나님만 알아주시는 형통의 길로 다 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고 또 진리로 인하여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교회도 많고 또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교계의 암울한 영적상황은 말씀이 말씀답게 바르게 선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대개의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은 대한민국 기독교가 부흥했다고 하지만 언제 이 모든 허망한 종교의 성들과 탑들이 무너질지 참으로 모르는 시대가 됐습니다. 저희들은 넓은 길로 가지 아니하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생각을 어그러진 길로 치달아 가지 아니하도록 섭리하시사 주의 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철저한 십자가 중심 신앙을 통해 진리를 모르는 타인들로부터 어리석다 하는 말을 듣는 모욕감과 멸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정한 생명과 영생의 길로만 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인 고독과 외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더욱 더 주만 믿는 심정으로 이 복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분명 형통케 하시리라 하는 오늘 주신 말씀 ‘이사야서 55장 11절’ 말씀을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참된 신령한 형통을 배우고 지각할 줄 아는 복된 백성들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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