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신령한 편지와 같다. 

즉 사람 마음 심비(心碑)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권면과 안부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고 편지의 글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건 비기독교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장로, 권사, 목사, 유명한 부흥사, 설교자, 신학자라도 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세상과 교계에서의 지명도와 대외적인 입지가 출중하고 또는 화려한 건물예배당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편지를 받는 자가 그리스도 안으로 진리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들어가 있느냐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수신자가 아니어서 이런 수신자는 편지의 모든 개념과 의미를 스스로 왜곡하고 상상한다. 보낸 발신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혼자 신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세상적 재미와 낙, 자랑 등으로 자기조차도 모르게 은밀하고 교묘히 경(經)의 글을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각도로 재각색해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적 본성상 거짓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성도’라 했을 때 여기서 ‘신실함’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뜻한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 때문에 당한 고난과 죽음이 ‘의’요, ‘자랑’이요,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굳게 믿는, 세상이 도저히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생각하기도 싫은 참된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자 고유의 어리석음이다. 곧 본성적 사고에 있어서의 자기부인과 세상에 대한 부정이다.

주의 복음의 말씀은 부모와 주위의 친척, 지인들이 모두 반대하는 남녀간의 사랑의 편지와 같아서 그 당사자들만 느끼고 알고 경험한 진실과 순수의 밀어(蜜語-密語)이다.

이런 면에서 물리적이고 생산적이며 외부적인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알아먹는 부흥과 발전만 거듭해 온 오늘의 대한민국 기독교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거나 정도의 차이일 뿐 대개의 주의 종들과 교인들이 편지 분량에 있어서 많거나 또는 적게, 하나님의 서신을 공문서 위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있어 외식(外飾)을 잘하는 종교인들(율법주의-은사신비주의-기복주의 신자들)은 교회에 넘쳐나나 진정 ‘신실한 성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편지의 발신자(하나님)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한다.

본인들은 정작 전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고 강력히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신실’하지 않고 ‘거짓’된 것이다.

무너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금의 상황과 징조를 보고 깨달음이 없는 신자는 자신이 거짓편에 서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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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이루신 십자가 희생의 공로로 말미암는 대속의 은총을 말함이다.

그런데 요즘의 교회들은 은혜를 구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약간은 챙기나 그보다는 현실적인 육체의 복, 돈과 건강과 명예 따위 등을 신(神)으로부터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마치 사람들이 타인들로부터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선물을 물건으로 받기보다는, 현금으로 받는 것을 더 훨씬 선호하며 수입상 짭짤해하는 심리와 비슷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현세적 육체적 물질적 복 따위 등도 복이기는 하다.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신자에게 세상의 것들은 다만 불경건의 재료로만 쓰이게 됨. 심지어 신앙명분상 많은 재정을 가지고 선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표방하고 앞세워도 그렇다는 말임)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신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란 그리스도 그 분 자체다.

그가 신자의 전체요 전부며, 생명이요 목숨이다. 곧 처음이요 나중이란 말이다.

또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절대 유일무이의 복이며, 지워지지 않는 자산(資産)이다.

신자란 바로 이 순수 은혜 덩어리인 예수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 받는다.

쇠하여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신령무궁의 진선미(眞善美)한 의와 사랑과 영생의 나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신자의 은혜관은 인격적이며 영혼 중심적이어야 하며, 내세적이어야 한다.

또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며, 그만 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은 참된 성도는 지상에서 부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유명하건 그렇지 못하건 상관없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절대 은혜의 주관자 안에 놓여 있는 존재이므로, 환경과 현실 등에 구애됨이 없고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가 모두 은혜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육체 성정(性情)을 입은 인간인지라 진리로 인한 환란이 오면 고통을 느낄 순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주심의 사랑과 은혜의 의미를 깊이 알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담대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지식이 있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다수의 세속적 크리스찬들은 예수+세상복과 만사형통=은혜라는 비정상적 신앙공식을 사모하고 굳게 믿는 오류의 길로 치달아 온지가 아주 오래 됐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으로 꽉 차 있어서 현대교회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천국복음이 아닌 세상복음을 듣고 마시면서 아멘 할렐루야를 연발하고 기뻐하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은혜는 이런 그릇된 기독교인들의 정신이 바로잡혀 온전해 지는 것을 눈으로 목도(目睹)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은혜인 것 같다.

지금은 바로 그런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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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世上)에는 현세적(現世的)인 여러 갖가지의 복(福)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에 지인(知人)들에게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德談)식으로 인사를 건낸다.

이런 인사에는 돈 복이나 건강의 복, 이것 등으로 인해 생기는 무사(無事)와 안녕(安寧), 태평(太平)과 번영(繁榮), 명예(名譽)와 나름대로의 세상적(世上的) 힘과 권력을 가지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의미는 이런 육신과 땅에 속한 세인(世人)들의 눈에 본능적 감각으로 보여 지는 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말하는 것이요, 그가 이룩하신 십자가 구원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肉)에 속한 이들 - 불신자(不信者)들 뿐만이 아닌 오늘의 절대다수의 육적(肉的) 기독교인들 - 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의 대상(對象)이요, 중요하고 귀중한 가치(價値)도 아니고, 도무지 땅의 세계에서는 자랑스럽지가 않아서 꺼려지는 것이고 욕(辱)된 것뿐이다.

또 이들에게는 도리어 재수(財數) 없음과 화(禍)로 눈에 비춰진다.

하늘에 속한 차원(次元)과 수준(水準)의 신령한 복이란 땅의 차원과 수준에서 봤을 땐 더 높은 것이 아니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낮고 천(賤)해 보인다. 그리고 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세상적 시각(視覺)에서 봤을 땐 무지(無知)와 미련함에 속(屬)한 것이다. 

- 불가(佛家)의 교리(敎理)나 공맹(孔孟)의 도(道), 윤리 도덕적 또는 기복주의(祈福主義)의 신(神)으로 이해되는 그런 식의 예수나 하나님은 인류의 정신과 마음에 주어지는 복이라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연(儼然)히 성경이 계시(啓示)하는 위로부터 나는 하늘에 속(屬)한 신령한 복이 결코 아님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 그러나 한편 고난과 죽음, 조롱과 멸시, 핍박과 박해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 예수로 인(因)해 하늘에 속한 참 믿음의 성도(聖徒)만이 아는 신령에 관한 감추어진 보화(寶貨)와 같은 절대유일(絶對唯一)의 복인 것이다.

곧 돈, 권력, 명예, 건강 따위 등이 없어도 예수로만 기쁘고 행복하며 영광이 되는 것, 영혼의 참 만족, 그런 가치와 생(生)의 기준(基準), 인생의 척도(尺度)로 주어지는 신앙을 뜻한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증거(證據), 세상에 속(屬)한 복이 없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당하는 구속(救贖), 진리와 영생(永生)의 참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땅에 속한 복들은 오래 못 간다. 결국 다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이것과 같이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게 설파(說破)한 종교적 성인(聖人)들과 도덕적 성현(聖賢)들의 얘기도 인간 속사람의 근원(根源)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영역(領域)의 것이 아니다. 단지 모사적(模寫的)이고 간접적인 것일 따름이다.

사람들을 죽음의 사망권세(死亡權勢)로부터 영생(永生)으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주신 그 십자가의 사건만이 모든 믿는 자의 영원절대(永遠絶對)의 복인 것이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고 죄인(罪人)인 인간이 진선미(眞善美) 하신 신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고, 신의 마음과 마음이 통(通)하고 하나 되는 것을 그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허락 받는 것, 그래서 신자(信者)가 신성(神聖)에 참여(參與)하는 인격적 성품상(性品上)의 거룩한 특권(特權)을 얻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올 한해 이 복을 깊이 깨닫는 자가 진정(眞正) 복된 자이다.

그러나 분명 그 수(數)는 극소수(極少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같이 사지(四肢)가 찢어지고 피를 쏟는, 진리로 인한

영적고통(靈的苦痛)을 감내(堪耐)하는 자만 얻을 수 있는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좁고 협착(狹窄)한 길에 놓여 있는 이 복을 진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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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인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비기독교도(非基督敎徒)이건, 기독교 신자이건, 여러 가지 사상적 형태로 신(神)을 논한다.

예를 들어 교회에 나가지 않고 믿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비신앙인(非信仰人) 철학자들도 -사실은 기독교 현대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마찬가지 - 각기 고유한 자신들만의 불가지론(不可知論), 이신론(理神論), 범신론(汎神論),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등의 철학적 신학적 신관념(神觀念)을 갖고 있다.

또 기독교 외에 다른 수많은 갖가지 세계내의 종교들에서도

저마다 신봉(信奉)하는 여러 다신(多神)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채롭게 저마다 이성, 역사, 문화, 자연 등의

일반계시(一般啓示)를 통해 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천연적 습성(天然的 習性)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내재적 영역에서 신을 보면 신의 그림자만 보게 되는 격이고 신의 앞, 얼굴이 아닌 등, 뒤만 보는 꼴이기 때문에 결국 신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단지 내적(內的)으로가 아닌, 외적(外的)으로 드러나 있는 빗나간 신(神)의 형상만을 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현대교회에 다수의 율법적(律法的), 외식적(外飾的), 형식적(形式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현세적 안목(現世的 眼目)으로 이 성부와 성자를 육체대로 - 이 말의 뜻은 탐욕적인 육적 그리스도인들의 기복적 신앙 뿐 만이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내의 고급한 윤리도덕에 기반(基盤)을 둔 고도로 경건한 종교적 심성으로 하나님을 접하는 신앙과 신비적 은사역사(神祕的 恩賜役事) 중심의 신앙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임 - 알고 믿기에 이들이 우러러보는 하나님이 과연 진짜 참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다.

입술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이 아버지에 대해서 스스로 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 말씀, 마태복음11장27절에 나오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라는 예수의 말씀과 같이 특별계시(特別啓示)의 주체자(主體者)인 이 아들 안에 신자가 거해야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아버지를 아는 것이지, 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않으면 아버지와 실질적으로는 아무 상관없는 자기 사고에 기인한 이름만의 그리스도인 밖에 될 수 없다.

허나 오늘날 계시의 정신을 소유하지 못한 육체와 이성중심의 크리스찬들은 ‘하나님’하고 외치면서 자신들의 머리에서 떠올리기만 하면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분은 불신자인 세상 사람들과, 하물며 신자라 하더라도 육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사고에는 담겨 질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시기에 육의 존재자인 한낱 피조물인 인간 따위가 포착(捕捉)하거나 파악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인간의 전적타자(全的他者)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절대지존(絶對至尊)이시기 때문이다.

비유를 든다면 이 말은 과거에 감히 일반 평민이 허락도 없이

분봉왕(分封王) 급(級) 정도도 아닌 그 보다도 더 큰 황제(皇帝) 앞에 직접적으로 나아가 알현 할 수 없는 것과 같고, 우리에서 뒹구는 구정물 범벅이 된 돼지와 그 돼지의 주인인 사람이 깨끗한 침대에서 함께 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삶의 방식이라는 현실과 비슷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 성품이 완전한 사랑이신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참 하나님 아버지인 자신과 죄인인 인간을 이어주는 이 중보자를 인간의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셔서 성육신 하게 하심으로 - 여기서 아들이 본질상 아버지 보다 못하다거나 다르다는 말이 아님 - 오직 이 생명의 권세자요, 구세주인 아들로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유일한 절대적 법칙을 세우셨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에게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는 크나큰 특권을 받을 기회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사(下賜)하셨는데 그것이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율법적 신앙아래 갇혀 있다가 - 신앙인이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부터 예수와 복음을 알 수 없고 또 오래 다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계시를 머리로가 아닌 마음과 삶 내지 실제적으로 제대로 깨닫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 자신의 육적자아(肉的自我)가 십자가라고 하는 신령한 계시의 말씀에 못박혀 죽어지면 전혀 다른 차원의 그리스도 예수의 이질적 생명(異質的 生命)을 받고, 그리스도 이 분과 연합되어 이 아들과 같은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은 허물진 종자(種子)인 죄된 인생들을 아들(자녀)로서, 장자(長子)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동등된 지위로 대접하신 다는 것을 - 신자가 신앙을 갖기 이전의 삶은 영적으론 마귀의 자녀이고, 그 이후 교회에 입문하여 육신적 사고 중심과 윤리도덕상의 초보적 수준의 율법신앙 아래에 있으면, 복음신앙의 주관자인 아들 그리스도를 다만 피상적(皮相的)으로 알게 됨으로, 아들의 믿음과 양자의 영을 소유 하지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분관계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된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인에게 아직은 자신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단지 무서워하는 주종(主從) 관계일 뿐임 -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구속사건의 계시로 드러내셨다.

바로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드러난 십자가계시를 깨달은 자에게만 이 은혜는 유효(有效)하게 남김없이 적용된다.

이 계시로 주어지는 은혜는 다만 신앙생활의 연조(年條)가 깊은 오늘날 기존의 신앙인들만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교회 출입을 전혀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계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公生涯 使役) 당시에도 그 잘나고 거룩해 보였던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심각한 영적 소경들이었다. 오히려 사회의 전형적 죄인들 중에 대표적 케이스(case)인 세리들이나 창녀들이 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말(특별계시)을 쉽게 파악하고 받아들여 천국에 먼저 들어가는 은총을 얻었었다.(마태복음21장 28절-31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오늘의 대다수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나라 바깥백성이 되어 어두운데 쫒겨 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고, 부패 타락한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서 개독교라고 하는 저 죄인들, 어둠의 자식들인 안티크리스트(antichrist)들이 하나님나라 안의 백성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강단 메시지와 목회철학을 듣고 들여다보면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인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아들의 소원(所願)대로 계시를 받은 것 같지 않다는 진단(診斷)을 내려야만 할 것 같다.

먼저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교회를 찾기 힘들다는 것과 - 교단(敎團)과 교파(敎派)적으로 간판만은 복음과 개혁을 표방하는 교회들은 넘쳐남 - 현대교회에서 나타나는 예수를 보면 결코 천국적이지 않고 세속적이어서 목회자들에 의해 어떤 교회들은 무속적(巫俗的) 신비주의적(神祕主義的) 예수, 어떤 교회들은 율법적(律法的) 예수, 어떤 교회들은 자본주의(資本主義的) 내지 신자유주의 세계화(新自由主義 世界化)라는 제국주의식(帝國主義式) 예수, 어떤 교회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식(共産主義 社會主義式) 예수 등등으로 신도들에게 그 헛깨비와 허상(虛像)인 예수가 조달(調達)돠고 있기 때문이다.

곧 대중들 눈을 깜쪽 같이 속이는 진짜와 아주 흡사한, 그리고 신앙의 감동을 주고 감격의 눈물까지 흐르게 해주는 가짜 예수란 우상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교회의 병폐는 스스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점수 주고 자리매김 하는 자들이 자기들 생각을 앞세우고 성경을 따다가 도용(盜用)을 하고 있으면서 다 계시 받고 신앙하고 있다고 오인(誤認)하는데 있다.

일반계시 차원만을 이해했거나 거짓계시를 받았으면서, 아니면 계시에 대해서 전무(全無)할 정도로 관심이 없으면서 말이다.

전부 다 예수를 전하고 믿는다고 하나 자신이라고 하는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똥덩어리를 예수에게 투영(投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진정 오늘의 크리스찬들은 다만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요식(要式) 때문에 과연 영적 신분상 아들로서, 또는 아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오해하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 맺고 있다고 자부(自負) 할 수 있을까?

혹 아들이 아닌 종들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있어서 엑스트라(extra)들은 아닐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들만 천국을 상속(相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은 천국의 기업을 이을 수 없다.

그냥 주인의 집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사장(死藏) 되는 것이 종들의 일생이다.

자칭 천국의 장자(長子)요, 주인공들이라고 큰 착각에 빠진, 세상에선 유명하나 사치하고 부패한 오늘날의 현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이 영적인 참된 현실에 관하여 직시(直視)하고 명심(銘心)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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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호(聖號)와 존재자체를 찬양한다.

하나님은 만유[萬有]의 주재(主宰)이시자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들에게 -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典形的)인 어떤 특수한 죄인들에게 조차도 - 거저 은혜로 영생을 허락하시고,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동등된 지위를 주시며, 거룩을 선물로 옷 입혀 주신다.

이것은 이루 형언(形言) 할 수 없는 큰 복인데, 이 사실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해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신다. 즉 천국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이 진리를 제대로, 정확히, 깊게, 경험하고 알아야, 자신의 마음의 입술로 부르는 곡조(曲調) 있는 참 신앙의 고백의 노래가 온 하늘에 상달(上達)되고 사무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진리를 알면 알수록, 머리로가 아닌 마음과 삶으로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 주(主)를 앙망(仰望)하는 자의 신분의 정체성과 삶 자체를 하나님은 신령하게는, 마치 경건한 신자의 삶이 예배고 기도인 것처럼, 곧 ‘찬송’이라 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讚揚)하기 위해서 주의 말씀으로 진리의 성령 안에서 신앙인격이 자라나 성숙해져야 한다.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부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취향, 정신, 문화, 환경, 인격 등의 상태와 수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요는 아이들이 부르지, 어른들은 따라하지 않는다.

또 어른들은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빠른 랩(rap)의 내용과 그 세계가 도통(都統) 이해가 안 간다. 마찬가지로 젊은 신세대층들은 가령 배호의 ‘황토 십리 길’ 같은 옛 가요는 시대와 문화적 괴리(乖離)와 삶의 정서상 체험해 본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들어도 실감이 안 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도 그 믿는 자의 영적상태와 진리의 인식수준에 따라 제각기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다.

요즘은 복음성가나 CCM을 들어보면 참으로 세상적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저속한 곡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와, 찬송가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다.

현대 교회가 세속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고, 이는 다름 아닌 바른 신학의 부재(不在)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한편 오늘 모 기독교 인터넷신문을 보니, 얼마 안 있으면 5년 만에 또 새찬송가가 발간(發刊)된다고 한다. 찬송가 관련단체와 기독교출판사들이 100억 매출을 기대해서 이 같은 판을 벌린다는 추측기사가 났다.

한 출판사당 매년 30억 원의 이익을 올릴 수 있고 찬송가공회도 7억의 인세[印稅]를 거둔 단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사사로운 경영 전략적 마인드로 변경(變更)시켜, 수익사업을 활발히 펼치고자 하는 인간들의 속셈인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꼴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없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노래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의 언약(言約)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찬송’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필자(筆者)가 이미 이 글 초반부에서 밝혔다.

이런 측면에서 돈과 세상탐욕에 눈 먼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대다수의 신자들이, 더 나아가  돈과 종교권력에 마음을 뺏긴 수많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과연 하나님이 영예롭게 생각 하시는 ‘당신의 자녀’, ‘하나님의 찬송’이 될 수 있겠는가?

요한계시록 14장3절에 보면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새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라고 말씀하였고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새일파 등을 포함한 여러 신흥종교단체들은 십사만 사천이 제각기 자신들 같은 특정집단이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요한계시록 15장 2절 이하에 보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해(註解)

 

땅: 죄와 사망의 권세로 가득한 이 세상. 쇠하여지고 썪어 없어질 흙의 이 세상, 육의 세계.

 

십사만 사천: 중생(=重生, 거듭난)한 진리의 완전한 의인들(=참 신앙을 소유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새노래: 그리스도의 신령(神靈)한 십자가의 도의 재발견(再發見), 깊이 있는 새로운 차원(次元)의 계시(啓示)와 믿음을 지니고 하나님께 찬송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전인격(全人格), 그 온 몸과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짐승: 마음에 참 하나님과 의와 생명의 진리가 없는 자들의 총체적(總體的) 세력을 상징.

 

그의 이름의 수: 규합(糾合)된 짐승의 수. 악마 같은 짐승들의 힘, 육백 육십 육.

 

유리 바다가: 성도의 성결한 상태. 내적으로는 맑고 투명한 신자의 거룩한 심령천국(心靈天國).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신자의 영적 상태 내지 더러운 죄악의 무리에 대해 승리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정결한 의의 세계.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모세(=구약 율법의 대표자)

어린양(=신약 복음의 대표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고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참 믿음의 성도들이 비진리의 실체적(實體的) 세력과의 투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해서 승리자 반열(班列)에 들어가므로 이 율법과 복음의 영광스런 완성적 역사를 하나님께 찬미(讚美)하는 것임))

 

이 성구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장성한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새노래를 통해 이 진실한 성도들의 계시의 믿음의 정신세계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회의 신자들은 이 신앙의 고품격(高品格)과 차원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중심으로한,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신자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을 뜻하는, 성령의 주도적 인도(引導)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성도는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겨야 한다. 말이 쉽지 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恩惠)란, 또 역(逆)으로 알고 보면 이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알아가기와 알기 까지가 - 이 일은 이중적(二重的)이며 순환적(循環的)이고 단회적(單回的)이며 연속적(連續的)인 - 무척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곧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부분이 대한민국 교회가 넘어야 할 산(山) 이자, 큰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절대로 사람이 할 수 없다.

그래서 주(主) 만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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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하늘의 영원한 평강(平康)은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평강이요, 세상의 평안(平安)은 모두 육체적이고 일시적이어서 사람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연인들과 요즘의 비진리(非眞理)에 속한 크리스찬들은 돈과 건강과 육신의 자기 자랑거리가 있어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으면 그것이 인생의 안전(安全)이요, 곧 평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이런 돈과 건강과 명예 따위 등을 계속 소유하거나 모두 다 지니고 살아갈 순 없다.

또 돈과 건강과 명예 등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며, 더욱이 인생의 참 의미 자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 되는 절대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영혼의 참 평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론 세상에도 고급한 삶의 여러 가지 가치(價値)나, 철학(哲學), 주의(主義)와 사상(思想), 종교(宗敎)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평안을 추구하기는 한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로 난 평안은 이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질성(異質性)을 가지고 있다.

참 성도의 참 평안은 예수가 - 상대세계(相對世界)인 세상이 말하는 그림자적이고 모형적(模型的)이며 아이들 장난감 같은, 잠시 있다 사라질 형적(形跡)에 불과한 거짓된 모사적(模寫的) 평안, 보다 위에 있는 - 실질적(實質的) 참 평안의 주인(主人)과 평화의 왕(王)이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메시야를 믿어 그와 함께 육체의 사고(思考)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죄와 사망의 근심과 고통과 권세가 자신에 대해 죽고, 자신도 이것들에 대해 죽어, 더 이상 이에 대해 상관없는 자유와 해방을 맛보아 진정한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구원의 체험의 흔적(痕跡)과 믿음을 가진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는 세상을 능히 이기게 하는 힘의 원천(源泉)이 된다.

이것은 사단의 죄의 권세, 죽음의 공포, 세상 시험과 유혹의 갈등과 고통 등으로 부터 피로 사신 주의 백성을 승리케 하여 영적으로 안전(安全)케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의 참 평안이란 극심한 현실 삶의 수난(受難)과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고 감사해 하며 평안해 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바로 신자에게 그것을 삶으로 증명할 것을 요청(要請) 하신다.

그러한 면에서 진실한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 사람들과 오늘의 다수의 기복적(祈福的)인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바라는 인간 본성이 알고 있는 평안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복음진리로 인한 삶의 고난을 오히려 피하지 말고 더 자처(自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만 하늘의 위로와 참 평안을 발견해 세상을 능히 이긴 빛나는 천국의 황태자(皇太子), 황후(皇后)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편안한 외부적 환경과 조건을 조성(造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도 제압(制壓)하고 정복(征服)하고 다스릴 줄 아는 참 평강의 사람이 될 것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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